#4. 매력중의 매력, 인간미 아니겠소
우리 편의점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주변으로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인지 높은 연령층의 어르신 고객도 많은 편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비슷한 연배의 손님들을 뵐 때면 나도 모르게 친근하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꽤 오랜 시간 보아온 단골손님들에게는 막역하게 할머니~, 할아버지~ 하고 부르기도 할정도로 말이다.
적어도 2~3일에 한 번씩은 꼭 오시기 때문에 정이 꽤 들었다. 간혹 오랫동안 가게에 오지 않으시면 아프시거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오늘 소개할 욕쟁이 할아버지도 이런 어르신 중 한분이다.
욕쟁이 할아버지는 첫 등장부터 현란한 욕을 구사하셨다. 미간을 꽉 잡은 주름과 혼잣말 같은 알 수 없는 내용에 시방새부터 조카 십팔색 크레파스까지 별의별 욕을 다 들려주셨고. 한동안은 욕지거리가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오해를 품고, 할아버지에게 한번쯤 묻고 싶었다.
“할아버지 저 맘에 안 들죠?”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고, 그저 “1,600원입니다.”라며 가격을 읊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아버지의 욕도 흘려듣게 되었고 주요 구매품목이 무엇인지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은 도수 높은 빨간딱지 소주와 담배였다. 소주는 거의 매일 한 두병, 담배는 서비스로 드리는 공짜 라이터를 받기 위해 한 달에 두 어 번쯤 보로로 사셨다. 그리고 틈틈히 모아둔 소주병도 가지고 오셨다. 한 병에 백원짜리 소주병을 스무병 모아온 다음 돈을 더해 다시 소주로 바꿔가셨다.
욕쟁이 할아버지의 반전 매력은 방심한 순간 터졌다.
그날은 사장님 대신 연장근무를 하던 날로 저녁 6시까지 12시간 근무하는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세시쯤 됐을까? 간간히 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앉아있는데 이미 오전에 오셨다 가신 욕쟁이 할아버지가 다시 오셨다. 가끔 소주를 추가로 더 사갈 때도 있어 역시나 소주겠지 하면서도 할아버지의 동선을 따라 내 시선도 움직였다.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멈춰선 곳은 의외였다. 바로 유제품 냉장고 앞이었다. 할아버지는 맨 아래쪽에 진열된 1L 우유들을 잠시 쭉 둘러보셨다. 뭔가 맘에 들지 않는지 잠시 인상이 찡그러지며 빈 매대를 가리켰다.
“여기 제일 비싼 놈 없어?”
“네? 아아.. 서울우유는 지금 없어요.”
“저 안에 더 없어?”
“네. 창고에도 없어요. 옆에 매일우유는 어떠세요?”
“안돼... 우리집 개새끼가 그거 밖에 안 처먹는단 말야.”
“개..새끼요??”
“그려. 개새끼. 장날에 강아지 한 마리 사왔는데. 아직 애기란 말여.”
뭐지? 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신선한 상황은?
구성진 욕쟁이 할아버지가 강아지를 먹인다며 편의점에서 제일 비싼 우유를 찾는 모습은. 순간 웃음이 터지면서도, 매일우유를 들고 사뭇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할아버지의 표정에 덩달아 나도 진지해졌다.
“어쩌죠....”
“그러게 말이여. 싼 건 또 안 먹대. 주둥이라고 달려서 비싼 건 잘 알아.”
순간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할아버지가 애타게 찾는 우유가 있긴..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지만.
우리 매장의 경우 유통기한이 당일까지인 유제품은 매일 아침 오픈 준비를 하며 미리 폐기한다. 이후 직원들이 자유롭게 마시거나 원하는 단골손님에게 드린다.(사장님은 너무 많이 드셔서 너무 질리셨다고..) 할아버지가 찾던 우유는 이미 아침에 폐기가 됐고, 폐기를 모아두는 우유박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욕쟁이 할아버지의 까랑까랑한 성격에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드린다고 하면 화를 내시려나? 욕쟁이 할아버지와 폐기된 우유를 번갈아보며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가게를 나가려고 하셨다. 문밖을 나서기 직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왜?”
“혹시 괜찮으시면 이거 오늘 아침에 폐기난 건데 그냥 드릴게요. 강아지 주실래요?”
그토록 찾아 헤맨 우유를 흔들며 말하는 내 모습에 할아버지는 순한 양처럼 계산대로 다가오셨다.
“그걸 그냥 준다고?”
“네. 어차피 오늘까지라 저희는 못 팔아요. 그렇다고 상한 건 아니고 멀쩡해요!”
“알아. 근데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그냥 가져가..?”
“괜찮은데...”
“어휴.. 알겠어. 고마우이.”
“네. 안녕히 가세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놓인 마음의 벽을 허물기에 충분했다. 가장 저렴한 담배를 피고, 소주 공병 환불에 공짜 라이터도 잊지 않으시는 분이 강아지에게 주는 우유는 제일 비싼걸로 고르시다니. 욕쟁이 할아버지에게서 새삼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아무리 말로는 개새끼라 격하게 말해도 작은 동물을 소중히 돌보고 위하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후 서울우유, 비싼 우유가 폐기로 나올 때면 따로 챙겨두었다가 소주를 사러 오신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할아버지 역시 공짜로 우유를 받아가기가 미안하셨는지 직접 키우신 무나 배추, 고추, 상추, 깻잎 등을 한보따리씩 가져다주셨다. 덕분에 나와 사장님은 신선한 채소를 종종 맛볼 수 있었다.
딸랑-
“어서오세, 어, 할아버지! 오셨어요?”
“응. 올해는 배추가 아주 다네. 비료를 많이 줘서 그런지 달아.”
“정말? 잘됐네요.”
“그러니까. 아주 힘뺐는데, 다행이지 뭐. 김장했어?”
“아뇨 아직. 김장하셨어요?”
“그럼 했지. 아직까지 안하고 여태 뭐했어? 담에 무랑 배추 하나씩 줄 테니까 물김치라도 담가먹어.”
“안 갖다 주셔도 되는데...감사합니다.”
우유와 농작물이 오가며, 우리는 친해졌다. 할아버지는 서서히 욕을 안하게 되셨고 할아버지와 제법 친해진 나는 매일 술을 드시는 할아버지에게 술을 조금 덜 드시라고 어르거나 구박하기도 한다.
“오늘은 왜 또 두병이나 사셔?”
“아랫동네 친구가 왔어. 돈도 안 받고 깨 다 털어주는데, 어떻게.. 이거(술)라도 한잔 줘야지.”
“그건 또 그르네. 적당히 드셔요.”
절대 굴하지 않을 것 같은 욕쟁이 할어버지가 내 눈치를 본다. 못이기는 척 할아버지의 장단을 맞춰드리는 것 역시 내 역할이다.
이제 할아버지에게서 욕보다는 속사포 하소연을 듣는다. 물건을 집어서 계산대로 오기까지 채 5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부지런이 말씀하신다. 날씨가 궂어서, 아들놈이 차 사고를 내서, 고라니가 키우던 작물을 뜯어먹어서 등등.. 하소연은 참으로 다양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이란 게 참 재미있다. 아주 사소한 사건 하나로 이렇게 달라질수도 있다니.
편의점에서 점원과 손님으로 만나 서로 이름도 모르면서 매일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가까워지며 살아간다는 점이 참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 만약 그날 우유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욕쟁이 단골 할아버지로 지켜봤을 것이다.
그간의 삶에서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벽을 쌓아온 나에게 편의점은 아직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알려주는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다.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접어두고 다시 마음을 열라고, 욕쟁이 할아버지와의 인연을 놓아준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