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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Dec 19. 2019

우리 아빠는 말이야.

자식의 입장에서도 더 마음이 쓰이는 부모님이 있다.



 부모는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유독 손이 가는 자식이 있다. 이건 자식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별에 관계없이, 부모님 중에서도 더 편하고 챙기게 되는 쪽이 있기 마련이다.


가스를 다 써야한다며 집에서 캠핑버너를 꺼낸 아빠!



  나의 경우, 아빠였다. 우리 집은 딸만 둘인데 엄마와 언니가 서로 친하며 챙기는 분위기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남자라 혼자 소외되는 아빠를 더 챙겼다. 아빠와 나는 죽도 잘 맞았다. 장난도 잘 쳤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고 사춘기가 왔던 시절을 빼면 언제나 절친이기도 하다.


 아빠의 취미는 티비보기인데, 가장 좋아하는 예능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정글의 법칙>, <나혼자 산다>이다. 물론 드라마와 영화도 빼놓지 않고 본다.

 가장 최근 아빠에게 빅 재미를 준 드라마는 <호텔 델루나>다. 드라마를 못 본 다음날에는 나에게 다시보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델루나’라는 모텔의 오픈 플랜카드를 보고는 “죽은 사람이 가는 데야? 아님 죽을 사람들이 가는 데야?”라며 할배 개그를 시도하기도 했다....... 드라마나 프로그램의 뒷내용이 궁금하면, 친구들보다 아빠에게 물어보는 것이 빠를 정도로 아빠는 취미 생활을 사랑한다.




 아빠의 또 다른 취미는 등산이다. 산악회의 임원, 감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며, 2주에 한번 엄마의 눈치를 보며 등산을 다닌다. 사실 아빠의 취미 생활에 큰 관심이 없던 엄마는 “지 다리 안 아프니까 다니지 그것도 아프면 못 다녀.”라며 쿨하게 승낙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저녁 9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 대신 받았던 아빠의 전화에서 “0관 오빠. 바꿔 주세요.”라는 낯선 중년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흑화된 뒤로 산악회라면 의심과 질색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등산을 둘러싼 엄마와 아빠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앞으로도 지켜볼 일이다.





카센터에서 아빠의 알뜰함을 새삼 다시 발견!

 우리 아빠의 직업은 자동차정비사다. 기름밥을 먹은지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났다. 일에 대한 아빠의 태도에는 ‘묵묵히’ ‘부지런히’ ‘꾸준히’ ‘열심히’ 등의 포현으로도 부족한 무엇이 있다.


 그 무엇 덕분에 아빠가 다른 아빠들보다 더 힘들게 오랜 시간동안 적은 돈을 받고, 위험한 일을 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강철보다도 한결같은 아빠의 모습은 언제나 나의 자랑이다. 다만 아빠에 대한 걱정이 늘 따라다녔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TV속 아찔한 절단 사고가 아빠의 일이 될까봐 불안했다. 하지만 아빠는 예순 넷이 되도록 그 누구보다 꼼꼼하고 철저하게 안전을 준수하며 일하고 있다.


직접 차를 끌어보니 엄청난 메리트였다. 정말 슈퍼 왕 메리트!! 슈퍼마켓 집 딸내미가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먹는 것처럼, 난 공짜로 차 수리 받는다! 저번에 박살낸 둥둥이(나의 03년식 자동차의 애칭) 옆구리도 싸게 고쳤고(물론 부품비도 아빠가ㅋㅋ..) 얼마전 추위로 배터리가 방전됐을 때도 아빠가 그냥 고쳐줬당. 아빠 킹왕짱










 중학생 시절부터 나는 학교를 마치면 자연스레 친구들과 함께 아빠의 일터에 들렸다. 용돈을 핑계로, 짐이 무겁다는 이유로 아빠를 찾았고. 아빠가 내 친구들의 별명을 외울 정도로 자주 드나들었다.

 

여전히 아빠는 내 오랜 친구들과도 가깝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만나면, 날 데리러 나온 아빠가 친구들도 집까지 데려다 준다. 아빠는 선옥이를 선만이라부르고, 아람이네 집 앞 어두컴컴한 뚝방길을 걱정한다. 또 다른 친구 선영이에게는 나에게도 하지 않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아빠의 홈쇼핑 취향은 주로 식품류이다. 식탐도 없으면서, 홈쇼핑 속 음식에는 한없이 약해진다. 지금까지 떡, 곱창전골, 김치, 갈비탕, 그리고 나를 위해 보이차를 샀다.

 살 때에는 신나서 “정말 맛있겠지? 한번 어떤가 사볼까? 사자!”하며 사고, 정작 아빠는 먹지 않는다. 그렇게 쌓인 전리품들은 우리 집 냉동실을 꽉 꽉 채우다 못해 터지게 만들 지경이다. 요즘 난 냉장고 공간 관리를 위해 남자친구의 집으로 이 음식들을 몰래 빼돌리기도 한다.


 아빠가 나에게 보이차를 사준 이유는 단 하나, A/S차원에서다. 내 살크업의 초석을 마련한 분이 바로 아빠였다. 아빠는 고기를 참 맛있게 잘 굽는다. 촉촉하지만 부드럽고 씹히는 맛이 살아있게 말이다. 아빠는 고기를 잘 굽는 것은 물론이요. 내가 싫어하는 기름 부분은 일일이 가위로 잘라낸 뒤 내 밥에 놓아줄 정도로 맞춤 서비스를 해줬다. 이러니 내가 살이 찌기 쉬울 수밖에..

 아무튼 아빠가 내게 보이차를 사준 건 ‘시에나. 보이차 마시고 살 좀 빼자.’의 의미인 것 같은데... 참 쉽지가 않다.


 아빠는 살크업의 토대를 쌓았을 뿐만 아니라 두 딸들에게 남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를 보는 눈을 키워주기도 했다. 두어번 만난 소개팅 남에 대해 묻는 언니에게 “그 남자랑 고기 먹으러 갔는데, 더럽게 못 구워.”라고 말해줬다. 바로 날아온 대답은 “그럼 나가리네. 아빠는 고기 잘 굽는데.”였다.



 고기를 잘 굽는 것만이 아빠 매력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사실 아빠는 생색을 내거나 티냄 없이 우리 집 여자들의 다양하고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맞춰주는 능력을 가졌다. "빨래 건조대 줄 끊어진 거 금요일까지 고쳐놔요." "아빠! 이거 안돼. 고쳐줘." "아빠가 아리뽀리 밥좀줘." "(내방에서 아빠 폰으로 전화를 건 뒤) 아빠- 내방와서 불 좀 꺼줘.(방에 와서 이 녀석이. 하면서 끄고 나감)" 등등... 아빠는 우리 집의 집사인 동시에 운전기사도 자처한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가 ‘9시 도착이요.’이라는 카톡만 넣으면 아빠는 8시 55분까지 터미널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엄마가 새벽 비행기를 탈 때면 집에서 2시간 남짓한 인천공항까지 망설임 없이 데려다 줄 정도로 세 여자를 잘 데리러 오고, 또 잘 데려다 준다.



 가끔은 이렇게 엄마 여행의 마중을 나가는 아빠를 보면, 불효녀가 된 것 같다. 매년 회사 포상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아빠라고 해외여행을 안가고 싶을까? 두 딸들을 키우느라 여유가 없어서, 카센터에 묶여서 등의 다양한 이유로 아빠는 여행을 늘 미뤄왔다.

 아빠는 요즘 홈쇼핑 여행상품을 보며 여행을 꿈꾼다.  모습을 보면 이제 그만 불효하고, 함께 해외여행을 한번 가볼까 싶지만. 여러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만, 그래도. 내년에는 부디  실천해보고자 한다. 반드시! 기필코!




 PS.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아빠의 친구, 세탁소 아저씨가 몇 달전 장가계에 다녀오면서 사다준 기념품 때문에 벌써부터 아시아쪽 국가는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빠의 성에 차려면 유럽이나 미국정도는 밟아줘야 할 것 같은데.......큰일이다. 왜 세탁소 아저씨는 다이소에서 볼법한 메이드 인 차이나 감자칼을 사다주셔서.....일을 이렇게 크게 만드시는 걸까.....망할놈의 감자칼 꼴도 보기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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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의 집으로 유배 보내 버렸다.



앞으로도 아빠에 대한 나의 애정어린 관찰은 계속 될 것이다. 물론 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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