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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Dec 27. 2019

나의 가여운 막내 삼촌

영정 사진 속, 삼촌은 슬프게 웃고 있었다.



 엄마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김장을 담그지 않는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절인 배추와 무를 80kg이나 사서 김장을 담글 정도로 김치를 사랑하는 집안이었다. 다행이면서도 마음이 한구석이 짠해졌다.


 ‘막내삼촌 때문인가?’

막내 삼촌은 우리 집에 일 년에 세 번 놀러왔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김장날. 삼촌이 빌린 텃밭에서 직접 키운 고추로 빻은 고춧가루와 파, 갓 등의 야채를 가지고 오면 우리는 다함께 김장을 담그고 수육을 먹은 뒤 각자 김치통을 들고 해산했다. 김장은 엄마에게 막내삼촌을 떠올리는 매개체일 수밖에 없었다.



 작년 추석이 지나고 일주일 뒤, 막내 삼촌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오해하실지 몰라 미리 밝히지만, 스스로 삶을 저버린 건 아닙니다). 불과 추석 때만 해도 우리 집에 모여 서로 구박하며 전을 굽던 삼촌이 죽었다니...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하긴 막내삼촌은 추석 제사상 앞에서 죽음을 예상한 사람처럼 사촌 동생들에게 말했었다.



“다음 제사부터는 삼촌이 술 준비 안 할 테니까, 이제 너네가 사와야 한다.”









 막내 삼촌은 우리들(나와 언니, 사촌동생들)이 어릴 때, 무섭게 혼나거나 회초리를 배급했던 역할로 호랑이 삼촌이라 불렸었다. 호랑이 삼촌의 기구한 운명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외할아버지의 형님인 큰 할아버지가 아이를 낳지 못해, 사남매를 대표해 아주 어린 시절 큰 할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마치 큰집의 아들처럼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 내외를 보필하고, 일하며 자라왔다.


 큰 할아버지는 살아계신 동안 그리고 돌아가시며, 막내삼촌을 양자로 입적시켜 재산을 나눠주라 하셨지만, 큰 할머니는 허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삼촌이 커왔던 큰할아버지의 집까지 요양원에 들어가기 직전 자신의 친정 조카들에게 증여했다. 막내삼촌은 큰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 그 누구의 아들로 소속되지 못한 채 한 평생을 외롭게 지냈다.


 삼촌의 삶은 사회나 가정적인 안정을 이루지도 못했다. 큰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거나 목재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성공할 운이 따르진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기가 죽고, 호랑이 같던 기세와 골격의 장대함마저 사라져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지내는 시간을 행복해했다. 언젠가 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엄마와 곰탕집을 차리는 것이 삼촌의 마지막 꿈이었다.



 쉰이 넘은 나이에 삼촌은 공사현장 일용직으로 전전하거나 마땅한 짝이 없어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렸을 때는 빠듯한 집안 사정과 엄마가 힘들게 번 돈을 삼촌에게 부쳐주거나 핸드폰 요금을 대신 내주는 것이 못 마땅하기도 했었다.


 이따금씩 삼촌은 일을 마친 후 술을 마시고 식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몇 번은 억지로 받았지만, 불편하고 짜증났다. 술에 기대 삐뚤어진 목소리는 귀에 거슬렸고, 초라해진 삼촌의 처지가 마음을 힘들게 했다. 삼촌의 전화 벨소리를 갖가지 핑계로 못들은 척 했다. 삼촌의 전화는 서서히 간격이 멀어져 흔적이 사라져갔다.  


 이런 나와 식구들 때문일까? 혹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삼촌의 제사를 우리 집에서 지내서였을까? 설날과 추석이 되면 우리 집에 제사를 지내러  막내 삼촌은 아빠나 엄마, 우리 가족의 눈치를 봤다. 괜히 나에게 어색한 장난을 치거나 분주하게 끊임 없이 말했다. 삼촌의 그런 행동과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삶이  생각처럼, 마음먹은 대로 쉽지만은 않다는  알게  다음에야 삼촌의 모든 모습이 이해되었다.








 삼촌은 마지막 가는 길마저 쓸쓸했다. 새벽 출근길 현관 문을 나가기 전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이 왔고, 그대로 쓰러져 여덟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삼촌의 소식이 가족들에게 전해졌을 때는 이미 근처 병원의 영안실에 안치된 다음이었다. 믿을 수 없는 부고였다.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다.


 삼촌은 늘 나를 ‘귀한 조카님’이라고 놀리듯이 불렀다. 내가 편의점에서 일하며 겪었던 진상손님과의 일화를 무용담 늘여놓듯 말하면 실컷 내 편을 들어주고, 마지막에는 그래도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니 그냥 참으라고 말해줬었다. 늦은 새벽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면서 내가 생각나 졸고있던 알바생에게 수고하라며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줬다던 우리 삼촌.



 나는 아직 삼촌에게 용돈을 줘보지도 못했다. 명절이 되면 삼촌은 힘들게 일해서 번 단돈 만원, 이만원이라도 조카들에게 주고 싶어 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이 돈은 차마 쉽게 받아지지도, 써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삼촌에게 받은 돈을 책장 구석의 저금통에 넣어두었다. 삼촌이 준 용돈은 비상금이 필요할 정도로 궁핍할 때 써야지 싶은 귀한 돈이었다.


 작년 추석, 처음으로 삼촌에게 용돈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제사를 지내고, 집에 돌아가려던 삼촌이 택시를 타기 전에 ‘택시비라도 하라며 오 만원을 쥐어줘야지.’ 마음먹었는데, 왠지 모를 망설임이 들었다. 내가 주는 용돈이 삼촌을 더 지난하게 만들까봐 염려되었다. 잠시 주저하는 사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택시가 삼촌을 태우고 바로 떠났다. 삼촌의 살았을 적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내가 쥐어주지 못했던 돈은 차게 식은 삼촌이 관에 들기 전, 염을 할 때야 줄 수 있었다. 삼촌이 한줌의 재가 되던 두어 시간 남짓한 동안, 나는 그동안 그토록 외면해 온 외롭고 쓸쓸했던 삼촌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온 평생을 소속없이 떠돌던 처지의 삼촌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마음 둘 곳이었을 것이다. 마음을 뉘이고 조금 편안히 쉴수 있는 곳이나 사람, 이 모든 것이 충족된 가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외롭고 고단했을 삼촌의 삶을 기억하려 한다.


 부디 나의 가여운 막내 삼촌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삶은 좀 더 안온하고 행복하기를. 부잣집의 듬뿍 사랑 받는 막내 아들로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빈다.






/ 몇일에 거쳐 삼촌을 글로 기억하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삼촌의 모습은 가장 젊거나 좋아보였을 때가 아니라 염을 할때였습니다. 금방 깨어날 것처럼 잠든 삼촌의 얼굴은 살아있을 때보다 편안해보여서 엄마와 이모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 얼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이제 기억될 모습은 영정사진과 유골함에 새겨진 사진 속의 모습이겠죠. 사진속 삼촌은 우리를 보며 웃고있었습니다. 왠지 슬퍼보이는 그 미소가 슬퍼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후회는 언제나 늦어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사람이 있다면 아주 늦기 전에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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