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마땅히 할 게 없기도 했지만- 고민을 나누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좋았던 것 같다.
직장인이 되면서 산책은 다소 다르게 다가온다.
첫 번째는, 단연코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오늘 점심은 뭐 먹지? 출근하고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드는 생각이다. 구내식당 메뉴가 괜찮으려나, 별로면 나가서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나?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이런 사소한 즐거움은 대부분 만족스러운 식사로 이어진다. 아무렴, 열심히 일하려면 배도 든든해야 하는 법이지.
다만, 곧 과도한 먹방으로 이어져 배가 더부룩해지기 태반이다. 역시 과하면 독이 된다고, 맛있다고 무리해서 먹은 게 좋지 않은 법이다. 이 상태로 바로 앉아 업무를 본다면 배는 더부룩하지, 소화는 안 되지, 가뜩이나 과민성 장을 갖고 있는 내게 온갖 신경은 내 장으로 가기 때문에 피해야 할 상황 no.1이다.
그렇기에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부러라도 움직이려 노력한다. 점심 먹고 노곤 노곤한 상태로 책상에서 잠깐 눈을 부칠 수도 있지만, 그 상태로 오후 내내 더부룩해서 짜증 내느니 약간의 귀찮음을 이겨내서 산책을 택한다면, 적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투덜거릴 확률은 급격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보통 점심시간에는 직장동료와 함께 산책을 하기 때문에, 이 와중에 혼자 사색이라든가 생각정리 등을 할 여유 따위는 없다. 그저 커피 하나 손에 들고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두 번째는,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최근 개인적인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해 깊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가만히 있어도 문득 휩쓸려오는 우울한 감정은 내 삶에 가끔 버겁게만 다가왔다. 예고 없이 찾아온 우울함은 일주일 정도 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허나 이번엔 생각보다 길게 유지되고 있다.
업무 중일 때는 되려 그 사건과 내 감정에 대해 잊고 있다가,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그새 방심이라도 하냐는 듯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점심시간 산책이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혼자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시간.
내 일터에는 근처에 잘 알려진 천이 하나 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산책을 할 수 있는 거리가 정해져 있다 보니, 암암리에 정해진 찍고 돌아오는 지점이 있다.
참 신기하게도 산책을 할 때면 처음에는 이것저것 생각하다가도 곧장 10분 정도 지나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머리가 복잡하다가도 곧 멍-하니 머리를 비우고 그냥 반환점까지 잘 걸어야겠다는 생각만 남는다. 사실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몸이 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이럴 때는 마음이 아닌 몸의 승리가 된다. 이 순간 복잡했던 머리는 좀 상쾌해지고, 아렸던 마음이 조금 치유되는 듯하다. 다시 괜찮았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암시하는 것만 같아서.
온전히 정신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일터에서 보낸다. 그렇기에 직장이 지옥이 되는 순간,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 지옥에서 있는 나야말로 스스로 지옥임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이런 사소하고 소소한 기대하는 시간이 있다는 건 더더욱 소중하다. 내일은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