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정말 바빴다. 지난 6개월간은 생태눈깔로 살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자기 계발에 푹 빠져 퇴근 후 자격증 취득에 몰입하기도 했었고, 안 하던 운동도 시작해 건강 관리에 힘썼다. 와중에 틈틈이 연애도 하고. 개인적인 공부까지 하느라고 23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24년이 되자마자 지난 일은 바로 달콤한 꿈을 꾼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져만 갔다. 다시 이 시기가 온 것이다. 인생 노잼시기. 간헐적으로 찾아오는터라 이제는 무덤덤하게 '이 또한 지나가겠구나'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이건 내 착각이었다. 이번엔 노잼시기가 심상치 않다.
왜 내 인생은 재미가 없을까? 이 고민은 심연을 파고들어 원인을 찾아보니, 바로 회사에 있었다. 직장인이 되고 보니,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상당하다는 걸 출근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바로 깨달았다. 통상 다들 일하는 시간인 9 to 6로 봐도, 9시간은 회사에 있는 데다가 출퇴근시간까지 합치면 정작 나의 시간은 별로 없는 격이었다. 잠자는 시간인 6시간을 제외하면 내게 할당된 자유시간은 하루에 고작 4시간 남짓. 평일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기진맥진인 채라 평일에는 달콤한 주말만 바라보며 일하기 반복이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부터는 한숨만 퍽퍽 쉬며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게 결코 재미있을 수는 없다. 아마도 '나는 출근하는 게 재밌어요.'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바라볼 것이다. 너 미친 거 아냐?(사실 부러워서 얘기하는 거 맞다. 젠장) 사실 재미는 없더라도, 의미가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어려운 퀘스트를 깨고 성장하는 영화 속 주인공 같다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일을 스스로 해서 성장하는 동기부여가 된다면 상관없다. 다만, 요새 나는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은 벽에 부딪혀버렸다. 내가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회사에서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설상가상 그것이 중요한 업무가 아닐 때. 백조가 우아해 보이지만 밑에서는 열심히 헤엄을 치고 있는데, 이제는 발짓을 멈추고 싶어졌다.
그래서 요새 거울을 쳐다 보기가 괴로워졌다. 초점 없는 눈, 생기 없는 동공, 그래. 어디선가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동태눈깔. 사람의 인상은 눈이 좌우한다는데, 이제는 빛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열심히 발헤엄을 치던 백조가 움직임을 멈춰도 빠져 죽지는 않았다. 다만, 물살에 몸을 맡기니 목적지를 잃어버린 채 그저 떠돌 뿐이었다. 썩은 동태눈깔로 유영하며 현 상황을 바라봤다. 그러니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의 미래가. 그리고 이 회사에 다닐 나의 미래가. 회사가 10년, 20년 뒤에도 존속할지 그려지지 않는데 이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는 내 미래는 더더욱이 상상되지 않았다. 나의 경쟁력은 사라지고 있었고, 회사의 경쟁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나를 천국도에 데려가줄 수 있는 배라고 생각해서 탑승했는데, 알고 보니 무늬만 좋아 보였을 뿐 하자가 가득한 배였던 것이다. 물론 다들 으쌰으쌰 하면서 배의 부품들을 고치며 현재는 잘 굴러는 가고 있으나, 언제 몇 배 더 큰 크루즈에 부딪혀 가라앉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막상 이직하려니 막막해졌다. 나의 경쟁력은 뭘까? 아니지, 내가 하고 싶은 건 뭐지? 경력으로 가기엔 애매한 연차. 중고 신입으로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아예 새로운 일을 해볼까? 요새 그런데 뉴스에 살벌한 기사들이 많이 올라오던데. 경기가 안 좋고 물가가 너무 높아서 청년들이 살기 어렵다던데. 잠깐, 여기 그래도 월급은 괜찮게 줬잖아. 좀만 참자 원석아. 그런데, 당장 내가 물에 빠져 죽을 것만 같은데. 살려줘. 아, 누군가 나를 살려주기를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스스로 살길을 모색해야 할 뿐.
마음속 사직서를 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언제 퇴사하는 게 좋은 건지 고민한다.틈만 나면 채용사이트를 들어가 어떤 채용 공고가 올라왔는지 본다. 그러다가도 모든 게 막연해져 다시 창을 닫고 휴대폰 화면을 끈다. 검은 화면에 내 모습이 반사된다. 근심 가득하고 불편한 얼굴이 나를 마주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이제 인생은 핀 걸까? 아니다. 나도 끝인 줄 알았지만, 이건 시작이었다. 아마도 이 고민은 내가 일을 자의적으로, 그리고 타의적으로 그만두기 전까지 계속하지 않을까? 나 뭐 해 먹고살지- 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