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이 되는 방법
뚜벅이인 엄마를 둔 이유로, 나의 아이들 또한 필연적으로 뚜벅이가 되었다.
한 때는 10년 무사고 장롱면허의 위엄을 믿고, 운전 그까짓 거 연수만 하면 금방 할 줄 알았다.
운전연수 후 몇 번 혼자 차를 끌로 다녔고, 자신감이 붙을 때쯤 접촉 사고를 내고 말았다. 혼자 타고 있었길 망정이지, 아이들을 태우고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등골에 서리가 내린다.
그 이후로는 운전대를 잡는 게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심장은 곰돌이 모양 젤리만큼 쫄깃해지고, 오금은 급속냉동으로 얼어붙는다.
뚜벅이 생활에 크게 불편함은 없다. 원래 생활 반경이 크지 않은 데다가, 날씨라도 기막히게 좋을라치면 마치 적극적으로 '뚜벅 모드'를 즐기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기 때문이다.
집에서 아이들 학교까지의 거리가 좀 되는지라 코로나19 이전에는 학원차를 이용해서 등하교를 했었는데, 코로나 이후 학원 보내기가 불안한 마음에 학원을 끊고 아직까지도 걸어서 학교를 오가고 있다. 등굣길에 횡단보도도 많고 여기저기 공사 현장도 있어 동행을 계속해주고 있는데,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거릴 수 있어 이 또한 고단하지만은 않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뚜벅이의 본질이 현대문명의 이기를 거스르는 방향이다 보니, 그만큼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난감할 때는 비 오는 날 아이들의 등굣길이다. 저녁 뉴스에 다음날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라도 있으면 걱정이 이만저만 되는 것이 아니다. 비 오는 날 등굣길은 정말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푹 꺼진 보도블록에 생긴 물웅덩이, 각도를 잘 맞춰도 기어코 비집고 공격하는 빗줄기, 애써 가리지만 슬금슬금 색을 바꾸며 젖어가는 책가방,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아이의 우산을 바로 세워주고 싶은 강박이 더해져 그야말로 난관의 시간이다. 오, 맙소사! 제발, 하늘이시여!
우산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우산만으로는 모든 비를 가릴 수 없다. 바람이라도 좀 부는 날이면 우리의 상반신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 우산이다. 그리고 우산은 우리의 발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여름이면 반바지와 샌들 착용으로 만반의 준비가 끝나지만 그 외의 계절에는 우산과 함께 필요한 것이 레인부츠이다. 그런데, 이 레인부츠라는 것이 참 골치 아프기 그지없다.
레인부츠의 사용빈도가 아이들의 발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니 꼭 필요할 때 레인부츠가 작아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고 미리 준비해 놓으면 이상하리만치 비가 안 오거나 휴일에만 비가 오기도 하는 조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결국은 또 사놓은 레인부츠가 작아져 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비 오는 날, 잘 맞는 레인부츠를 준비해 놓을 수 있는 부모는 정말 대단한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다니, 세상이라도 구할 수 있는 준비성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아이들은 빗물에 묵직해진 운동화와 아예 빗물을 마셔버린 양말을 신고 학교에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학교에 들여보내 놓으면 비에 젖은 신발보다 더 무겁고 물을 먹은 양말보다 더 찝찝한 마음이 든다.
새벽의 어스름을 깨지 못하고 묵직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혹시나 하고 열어본 창문 밖으로 생각보다 굵직한 수직선이 죽죽 내리그어지고 있다.
'쳇, 요즘 일기예보 왜 이렇게 잘 맞아......'
애꿎은 일기예보 탓을 하며 신발장을 열었다. 그 안에 비장의 무기가 들어있다. 전날 배송받은 레인부츠를 현관 앞에 나란히 내려놓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적확한 나의 구매력이란... 훗!'
부지런히 아이들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비 오는 날, 뚜벅이들 앞에 펼쳐진 시련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물웅덩이도 그냥 첨벙 밟고 지나갈 수 있다. 거센 빗줄기에도 거침없이 발을 내딛을 수 있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뽀송한 양말 그대로 실내화를 갈아 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 오는 날 무적의 모습이다.
나 자신을 무적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의외로 특별난 게 아닌 때가 많다.
비 오는 날 레인부츠를 비롯해, 눈사람 만들 때 스키 장갑, 언제든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어폰, 어디서든 펼칠 수 있는 책 한 권, 집에서는 투닥거리지만 밖에 나가면 내편 들어주는 오빠나 누나, 시시껄렁한 농담도 웃으며 받아주는 친구, 언제나 기어들 수 있는 부모님......
마음 같지 않은 현실에서 내가 앞으로 한걸음 내딛을 수 있게 하는 것, 힘든 시간에도 나를 버티게 하는 것, 해볼 수 있겠다 용기를 주는 것,
아이언맨 슈트가 아니어도 나를 무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직 현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