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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책 <철학자와 늑대(마크 롤랜즈 저)>를 읽고

늑대에게 배운 것.



나란 인간이 싫어질 때, 모든 인간은 충분히 싫어할 만하다고 말해주는 책을 읽으면 위안을 받을까. ‘철학자와 늑대’를 읽고 나서, 나는 (인간인) 나를 더 마음 놓고 싫어하게 되었다. 비틀대는 인간으로 사는 대신, 앞으로의 삶은 늑대일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달릴까.  ‘땅 위를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달려나가는 브레닌의 수준은 바라지도 않겠다. 설사 내가 늑대로 변신한다고 해도 내 영혼은 이미 너무 계산화 되어서 우아함 혹은 위엄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힘을 가지게 된다면 약한 것들을 보지 않을 것이고 힘을 빼앗겼을 때 울며불며 항복할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다다랐을 때는 납작하게 엎드려 낑낑댈 것이다. 너무 자조적이라고? 너무 본질적이다. 늑대가 되어 달리는 일을 상상을 하는데, 저 멀리서 달리고 있는 것은 미래의 환희에 눈 먼 한 인간의 뒤뚱거림 같은 것이었다.


 한 철학자가 늑대를 사랑했던 것과는 다르게, 어떤 한 인간이 또 다른 한 인간을 사랑한다. 두 사랑의 공통점은 ‘사랑’이라고 명명 가능하다는 것과 그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일부분을 발견했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똑같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사실 두 사랑은 다르다. 철학자는 자신의 사랑을 ‘필리아’라고 부른다. 필리아의 필요 조건은 의지다. 내가 사랑하는 그에게 뭔가를 해주려는 의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도, 브레닌의 ‘곪아서 냄새가 나고 감염으로 엉망이 된 엉덩이를 한달 넘게 두 시간마다 씻기는’ 의지. 철학자는 그 의지에 대해서 그것이 브레닌에게 최선이고 자신의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를 안는 것, 그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고 믿은 적 있었다. 그러나 ‘에로스적 사랑’은 홀연히 왔던 것처럼 홀연히 간다. 이후에 우리는 사랑이 다했다고 말하게 된다. 소진되지 않을 에로스는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확답하기가 어렵다. 나는 내가 경험한 사랑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추어 생각할 때 사랑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그를 아껴주려는 내 의지를 스스로 잘라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필리아’의 필요 조건이 의지라는 데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의지를 행하는 것에 자주 머뭇거리게 되고, 그저 에로스적 감정의 늪으로 빠져드는 일들을 겪는다.   

 내 사랑은 왜 ‘필리아’일 수 없을까. 나란 인간 때문인지 너란 인간 때문인지 모르겠다. 계산적인 대다가 언제든 겁이 나서 물러설 준비를 하는 인간과, 늑대가 될 수 없을 인간 말이다.

 인간과 인간의 사랑은 이 못남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두 형제ㅡ 마크와 브레닌의 사랑은 단절을 경험한다. 브레닌이 삶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브레닌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늑대에게서 배웠다(p68)’. 

 그는 마크에게 인간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떠난다. 이후로 마크는 그를 꿈 속에서 만나며, 여전히 보리밭의 보리알을 추수하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학교 숙제로 인생 곡선을 그린 적 있다.  가로 축은 시간, 세로 축은 반으로 나눈 기준선을 중심으로 위쪽은 좋음(+), 아래 쪽은 나쁨(-)으로 점수가 매겨진 채 나눠져 있다. 내가 살아온 시간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갈 미래에 대한 좋음과 나쁨을 예상하는 것까지가 숙제의 끝이였다. 이것은 하나의 예로써, 인간이 삶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마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미래를 향해 직선을 그으며 살아간다.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을 희망하고 나쁜 일은 그저 나쁜 일이 된다. 좋은 일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치환 가능하다. 현대 인간들에게는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연기하는 일마저도 멋진 일이 된다. 마크에게 인생 곡선 숙제를 시켰다면 그는 도대체 브레닌의 죽음을 어디에 표시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사실 나는) 끊임없이 미래를 그린다. 어제는 책을 읽는 와중에 불쑥, ‘일자리를 빨리 구해야 할텐데.’로 시작하는 미래 걱정이 튀어나와 읽었던 문장을 세 네 번씩 다시 읽는 번거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일은 다반사다. 과거를 끄집어내 나를 닥달하는 것만큼이나. 나의 시간은 직선으로 달리고, 나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에 현재들을 ‘유예’시키는 데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순간’을 부여잡는 것의 중요성을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또 거짓말이 된다. 나는 ‘순간’마저 부여잡거나 소유할 수 있는 거라고 믿고 싶지만, 내게 순간은 한 번 핥아 보는 것도 힘들게 그저 스쳐지나 갈 뿐이다.


   미래를 향하는 우리 직선의 끝에는 죽음도 있다. 우리는 삶을 성취하고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그 끝에 다다라 내 모든 것을 앗아갈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죽음을 등에 업고(P291)’, 그것이 모든 것을 앗아가기 전까지, 더 나은 무엇이 되거나 더 나은 무엇을 갖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다가, 죽음에 잡아 먹힌다.


 그러나 브레닌은 암 선고를 받고 나서도 신이 나서 조깅을 나설 수 있는 늑대다. 늑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늑대라면 자기가 얼마나 아픈 상태인지를 모르진 않을 것 같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도 브레닌이 죽음에 잡아 먹히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죽음은 ‘그저 삶의 한계(비트겐슈타인) ’일 뿐, 삶 속에서 삶이 계속되는 한 그는 여전히 순간들에 있다. 아픈 늑대는 한 순간의 고통 때문에 소리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시 곧 신이 나서 조깅을 나설 것이다.


 브레닌과 니나(마크가 브레닌과 함께 키우는 개)는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산책길에 올라 똑같은 팽오쇼콜라를 먹는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그 순간이 왔을 때 그들은 그 순간을 음미한다. 팽오쇼콜라를 먹으면서 엊그제 먹었던 슈크림 빵이나 내일 먹을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원의 삶을 산다. 욕망을 업고 미래를 향하는 직선이 아니라, 순간 순간의 욕망을 제 때에 먹는 원의 삶에서 ‘다른 어떤 순간들과도 섞이지 않는, 그 순간 자체로 완벽한 순간들(P283)’에 있다.  매번 지루해져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서겠다는 나 같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순간’에 대한 인간 운명의 좌절을 안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을 때, 시지프스가 나왔다. (우리 꿈과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할 때가 왔다.)


 만약 시지프스가 불행한 것이 ‘가치 있는 목적’을 부여받지 않아서라면?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시지프스에게 값진 목적을 주기로 한다. 신들은 시지프스에게 신전(목적)을 지으라 명하고, 더불어 시지프스에게 꼭 목적을 이뤄내야 겠다는 ‘뜨거운 염원’까지 심어줬다. 염원 덕분에 신전은 곧 완성되었다. 시지프스는 그 완성을 경이에 차 바라본다. 


 마크는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더 한다.‘목적을 이룬 시지프스는 이제 무엇을 하면 되는가?’


 삶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을 달성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달성하자마자 목적 자체를 잃게 된다.  목적을 가지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왠걸, 목적을 이루고 난 이후로 우리는 무얼 바라보고 살아야 된단 말인가? 또 다른 목적을 만들어내야 할까?  결국 인간은 ‘목적 생산기’에 지나지 않을까? 


 삶에서는 뚜렷한 혹은 멋진 목표를 갖는 것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삶은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으니까. 그러나 꿈과 목표가 줄 수 있는 위안은 얼마 가지 못한다. 목표는 어쩌면 삶을 살기에 너무 겁이 많은 인간에게 목줄 같은 구실 아닐까.


목줄에 끌려가는 유행을 따르는 삶에는 행복이 있기도 쉽다. 행복이란 것도 어쩌면 너무 가혹한 운명을 가진 인간을 위한 마약 같은 거니까. 하나의 성취에, 한 웅큼의 행복을. 그것들은 유혹적이다. 가끔씩 눈을 뜨고 내 목줄을 느낄 때, 억지 가득한 그 목줄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끊어내려는 사람일까. 그래 본 적이 있던가. 아니, 그게 인간 본성에 어울리기나 한가.       


‘브레닌의 죽음과 타협하지 않았을 때, 나는 최상의 모습이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지프스가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가끔은 희망을 원래 들어 있었던 하찮은 상자에 다시 넣어두어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비록 그 의미 때문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유도 의미를 훼손할 뿐이다….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에게 영원토록 바위를 굴리도록 한 신들의 계획을 향해 시원하게 ‘엿 먹어라!’고 소리친다(P324)’.


 행복한 순간은 달콤하고 따뜻하다. 목적을 이루는 인간은 위대하고 가치있다. 그러나 행복과 목적이 내 삶에 던지는 속임수를 걷어내고, 나도 조금 둥글게 둥글게 돌아보길 소원하게 만든다, 이 책이. 아무래도 둥글지 못할 때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굽혀보려는, 조금이라도 위엄을 지닌 인간이고자 하는 의지가 소용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원을 돌면서 마주할지 모를, 아니 분명히 마주할 수 있는 ‘보리밭에 흩뿌려 있는 보리알’의 순간들을 응시하길 소원한다. 그러한 응시는 아무리 악마가 이것과 저것을 바꿔먹자고 해도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순간에, 아무리 큰 네가 나를 짓누를지라도 감지 않고 부릅 뜬 눈으로 너에게 마지막 발악을 내지르는 순간에 올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 잊기 편한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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