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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책<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고

여자는 왜 아름다워야 하나

 내 아름답지 않은 몸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내 몸은 현대 사회가 추종하는 전형적인 미의 기준에서 볼 때 아름답지 않다. (주관적인 자기애를 갖고 쳐다봐도 아름답지는 않다) 내 솔직성에 대한 의문은 내 몸에 대해 얘기하며 취할지도 모를 내 방어적인 태도에 관한 염려에서 비롯되었다.


 내 몸은 오래도록 자주 부끄러워야 하는 무엇이었다. 나는 내 몸과 함께 쭈볏대거나 뻣뻣하게 선 채로 내 몸에 던지는 사람들의 일차원적인 발언들을 받아 먹고 자랐다.

 그들이 나를 보지 않을 때에는 내가 나를 보았다. 내가 만든 감시의 눈들은 밥을 먹을 때에도 초콜릿이 먹고 싶을 때에도 교복을 입을 때에도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맛을 고를 때에도 돈가스를 먹을까 고민할 때에도 언제나 나를 지켜보며 감시했다. ‘너는 그걸 먹으면 더한 돼지가 될거야.’ ‘그렇지만 너는 그걸 먹고 더한 돼지가 되고 말 애지.’ ‘그럼 그렇지, 돼지야. 네 허벅지는 1cm 더 두꺼워졌어. 넌 정말 안될 애야.’ 눈들은 내 안에서 죄책과 자책을, 모멸과 함께 쉼 없이 불러일으켰다.


 나는 극심한 다이어트와 절제 불가능한 폭식 사이를 오래도록 오갔다. 하루를 아메리카노 세 잔으로 버티는 날들이 허다했고 닭가슴살 말고는 다른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다이어트 중일 때는 거울 앞에서 나를 응시하거나 런닝머신과 체중계 위를 오가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참았던 식욕이 봉인 해제되면 식빵 한 봉지를 다 먹고 치킨 한 마리를 더 구겨 넣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먹고 나서 숨을 쉴 수 있을 때쯤에 다시 뭐라도 입에 넣어야 했다. 그러다가 돌연 음식을 먹지 않는 일들을 반복했다. 불행의 고리를 돌고 또 돌았다.

  거지 같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래서 내게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는 것 뿐이다. 나는 내 20대의 많은 시간을 내 몸을 검열하고 좌절하는 데에 써버렸다. 검열은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최초의 다이어트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으니까.


 기억한다. 통통했던 내가 홀쭉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놀라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오!  예쁜 아이가 되었구나.’ 말해줬다. 혹은 예쁜 아이를 쳐다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때부터 였을까. 내게 ‘예쁘다’는 형용사는 다른 모든 수식을 이기는 말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오래도록 고군분투했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투였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누구도 무엇도 위하지 않는, 쓸모가 있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향한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늪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가졌던 ‘외모 강박증’이 결국 내가 멍청했기 때문에 겪은 것이라고 자책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 때가 많았다. 성공이 개인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는 문화에서 자란 나는 좌절을 내 탓으로 돌리는 데에도 익숙했다. 나는 그들이 내게 ‘뚱뚱하다, 살을 빼라’고 말했을 때 그들의 무례함을 보지 못했고 뚱뚱한 내 몸을 응시했다. 그들의 무례함을 용인하고 길러낸 문화를 포착하는 대신, 매번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마는 내 어리석음을 탓했다.


 ‘외모 강박증’의 실체는 우리가 사는 문화에 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들을 단독자로 생각하는 오류에 잘 빠진다. 우리가 종종 숲을 볼 수 있다면, 우리 개개인은 모두 어떤 문화 아래에서 그것이 침투해오는 깊은 영향을 받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책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내 개인에게 모든 비판과 책임을 돌려왔던 내 오류를 다시금 기억하게 했고, 결국 내가 속한 사회의 문화를 좀 더 쳐다보게 했다. 이것을 책임 전가의 논리로 이해한다면 그러시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겪어야 했던 ‘외모 강박증’이 나만 겪거나 특수한 사람들만이 겪는 개인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겪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정신적 및 육체적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 병의 뿌리를 먼저 문화에서 찾지 않는다면 해결책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우리가 사는 문화는 여성을 무시하고 착취해온 것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 여성을 아름다움의 정원에 묶어둔 것에 대한 경멸도 받아야 마땅하다.    


 내가 곧 서른이 된다고 했을 때 내 남자친구는 말했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고.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인간과 끝내고 싶었다. 아무데서나 주워듣고 아무나 농담처럼 쓴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말을 해서야 될까.

 저 말은 한국 사회의 지긋지긋한 여성 ‘대상화’를 잘 보여 준다. 아무래도 여자가 서른 즈음 되면 생물학적인 아름다움이 쇠퇴하기 시작한다는 여러 과학적인 증거물들을 들이대며, 끝을 운운한 것이겠지.

 여자는 생물학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아름다움이 왔다 가더라도 여자에게는 삶이 있는 한 계속해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 세상에 있다. 이 당연한 욕망을 모른 척하려는 비겁한 사람들이나 말살시키려는 악한 사람들을 내 앞에 데려다가 교육시키고 싶다. 왜? 너는 맨날 나를 가르치려고 들면서 내가 너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건가?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는 말이 하나의 관용어로 널리 쓰이는 사회는 그 사회가 어떤 식으로 여성을 폄하하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그런 말을 시시껄렁한 듯 함부로 내뱉는 남성들은 그 문화가 어떤 식으로 인간을 교육하는지에 대한 좋은 예시다.


 이제는 거꾸로된 예시가 필요하다.

 잠시 아름다움을 옆으로 밀어뒀을 때, 내가 찾을 수 있는 다른 욕망들을 마주하고 그것들을 위하여 내 돈과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붓기로 한다. 나는 서른이라서 끝이 아니라, 무지해서 끝이라는 것을 내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에게 가르치기로 한다. 되도록 많은 남성들이 귀가 닳을 때까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로 한다. 어느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한동안은 그저 듣고 있는 게’ 자신들이 할 일이라는 것을 알기로 한다. 그렇게 좀 덜 낡은, 좀 더 공평한 문화가 생겨나고 공평한 말들이 전해져서 남자든 여자든 깊숙이 감춰놓은 계급 의식을 모조리 털어내고 ‘성’으로 나눠지기 전에, 불완전하지만 서로 돕고 살 수 있는 '같은 종’으로서 서로를 먼저 마주하길 바란다.      

 우리가 조금씩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문화가 만들어내는 것들이 바뀌면 언젠가 여자 아이들이 ‘예쁘다’라는 말 대신에 ‘너는 직관력이 뛰어난 아이구나.’, ‘너는 예술적인 감각이 남다른 것 같아.’ ‘네 논리력에 당할 재간이 없어.’식의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는 날도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자란 여자 아이들은 누군가 함부로 서른이면 인생이 끝이라는 옛 속담에 대해서 말해줄 때도 어깨를 으쓱 털고 개의치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다 자란 여성들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얼마 가지 않아 썩 좋은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 아름다움이 당신을 구속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름답고 싶은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같다. 특히나 아름다움이 여자가 인정받기 가장 좋은 분야가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그것은 더욱 원초적인 욕망이 된다. 나는 누군가의 욕망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나. 대신 다음 질문은 꽤 중요한 대화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당신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시달리는가.’

 아름답고 싶은 욕망은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욕망에 포위당할 때 우리 겉모습을 시작으로 깊숙한 내 자아까지 좀먹게 되는 일이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내가 만나는 많은 여자들은 언제나 다이어트 중이고, 혹은 다이어트 예정이다. 우리들의 다이어트는 우리 신체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나와 내 친구들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걱정이고, 이제는 늙어버렸다며 한숨 쉰다. 그 걱정을 자신에게만 남겨두지 않고 주변 모든 여자 친구들의 어깨에 걸쳐 주길 좋아한다. 살이 쪘거나 빠졌다는 말을 서로에게 인사처럼 건넨다. 얼굴에 난 여드름을 가장 먼저 스캔하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여자는 이래야 된다는 남자들의 말을 무식하다고 배척하는 동시에,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아름다움을 갖추고 어떤 행동들을 해야 하는지 미디어 속 완벽한 여자들을 쳐다보고 탑재한다.아름다움에 눈이 머는 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그렇다. 엄마는 텔레비전 속 중년 여배우의 주름 없이 팽팽한 피부를 보고 놀라는 동시에 본인 얼굴의 늙음을 탄식한다. 이모는 내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인지 다른 무엇보다 궁금하고, 꼭 사야 하는 값비싼 기능성 화장품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한다. 또 내가 만난 어떤 여자들은 심각한 식이 장애를 겪고 있었다. 그녀들이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것이였고, 그것에는 언제나 미디어 속 너무나 아름다운 비교 대상들이 존재했다. 어떤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다른 걸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그녀는 예뻐지고 싶은 마음 혹은 예쁘지 않은 것에 대한 좌절감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과연 아름다움으로부터 좌절 당해 내 자아가 좀먹게 되는 일에서 몇 발자국이나 떨어져 있을까 생각하면, 감히 입을 다물 수 밖에.

거울 속의 내가 못생겨 보여서 기분이 나빠지는 일, 불긋하게 솟아오른 여드름 때문에 화가 나는 일은 다반사다. 어떻게 그런 것에 초연해질 수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허벅지가 너무 두꺼운 것 같아서 잘라내는 상상을 하고, 두툼한 러브핸들을 엄지와 검지로 끌어 모아서 얼마나 두툼한지 확인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정말 삼십 대가 넘어가면 이모 말처럼 기능성 화장품을 사야 하는 건가 싶어서 불안감을 느끼고, 나이가 들면 살을 빼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말에는 기운이 쭉 빠진다.


 그렇다면 나는 입을 다물고 내 자아를 좀 더 보살피고 언젠가 외모 강박으로부터 완벽히 해방되는 그 날이 오면, 이러쿵 저러쿵 떠들 자격이 있으려나.

 “안 좋은 날도 있냐고요? 실수도 하냐고요? 당연하죠. 미끄러지고 넘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두 가지 선택권이 있어요. 앞으로 나아갈 수도, 퇴보할 수도 있죠. 저는 앞으로 계속 나아갈 거예요.”

 이 책 속에는 많은 여성들이 나오고 그들의 다양한 사례가 나오고 저자의 아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결책이 나온다. 내가 겪었던 ‘외모 강박증’을 유사하게 겪은 다양한 여성들의 사례들 속에서 내 사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을 읽으면서는 내가 ‘외모 강박’에 맞서 시도했던 방법들이 꽤 괜찮은 방법이였구나 싶어 안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의하고 싶었던 말은 ‘콜린’이라는 여성이 했던 저 말이다. 

 나는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감시의 눈과 싸워서, 시선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일을 하는 중이다. 완벽하지 않다. 어느 쪽으로 누워도 완벽하지 않다. 그럴 때 해야 할 것은 그 자리에서 하면 좋을 것들을 선택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일이다. 나는 그랬다. 매번 내 외모가 싫어질 때마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내 다른 특징과 능력들에 집중했다. 언젠가부터 내 외모가 싫어질 때보다 내가 나여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좋아할 때가 많아졌다.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데 내 얼굴과 몸은 이제 어떤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부분들에서 나는 훨씬 풍부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이제 ‘예쁘다’는 말은 나를 한 대 칠 수는 있겠으나, 더 이상 나를 압도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래의 가영아

거울 앞에 서 있기에는 세상이 너무 넓고 예뻐지는 것만 생각하기에는 우리 뇌는 너무 정교하게 크다는 걸 잊지 않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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