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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칼럼 <8시간 노동의 험난한 여정>을 읽고

내 노동에 대하여

사브리나가 How are you Karen? You look so tired today 내 안색을 살피며 물어봐 줬을 때 ‘신물이 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sour 라는 단어 하나를 붙잡고 영작을 시도해봤자 그녀가 What? 하고 찡그린 얼굴로 되물을 게 귀찮아져서 그만 I’m fucking tired, 대답했다. 목구멍으로 역류해오는 시큼한 물을 삼켜내야 했다.  

 나는 오늘 10시간을 서서 일했다. 8~10시간 서서 일하는 것을 4~5일씩 연달아 하다 보면 사람이 조금 삐뚤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10시간을 서 있는다는 건, 정말 서서만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인데, 거기다가 몸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도 계산이 일어나야 하고(저 두 손님을 6번 테이블에 앉히면, 다음 예약 테이블을 위해서 4번과 5번 테이블을 붙일 수 있다. 어? 저 손님 지금 5번 테이블 가면 안되는데, 얼른 따라가야겠네, 생각 하면서 계산대에서 테이크 아웃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내어주는 것 같은), 귀로는 사장의 규칙적인 썩은 소리(Karen! Make sure everything’s perfect! Make sure customer’s happy!)를 들어야 하는 총체적 난국의 중심에 서는 일이다. 거기다 바쁘든 바쁘지 않든 딱 4시 반까지 지켜내야 하는 마감을 생각하면 나는 한시도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집에 돌아와 양말을 벗고 딱딱한 식탁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보면, 세상이 그냥 이대로 파한다고 해도 별로 불만을 제기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 된다. 일을 하는 중에는 피곤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피곤함을 느낄 수는 없다. 내 몸이 아직 긴장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온 집에서 긴장이 벗겨진 내 몸은 피곤으로 절여진 생선 한 마리의 멍 때림이다. 생선은 멍하고 싶어서 멍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생선은 아무 것도 담을 수 없게 너무 짜게 절여져 버려서 정신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이야기가 들어와도 허무맹랑한 공기처럼 눈과 귀를 통과할 뿐이다. 의미 있는 것들을 담기에는 너무 낡은 쓰레기통이라서 이리 저리 채이면서 굴러다닐지라도 나자빠져 있고 싶다는 마음 뿐이다.   

진정하게 피곤할 때는 뇌는 의미를 구하지 않고 몸은 켜켜이 쌓이는 피로의 지층을 순교자처럼 받아들인다. 허벅지가 시큰거리고 발바닥이 쑤셔대서 잠에서 깨는 밤이 생긴다는 것을 나는 노동자가 된 후로 배웠다.


  알바생은 명랑할 수 있다. 알바생은 자신이 노동의 시한부를 겪다 말 것이라고 믿는다. 알바생이 노동자가 되어버렸을 때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노동자는 그야말로 노동하는 자다. 정체성의 얼마쯤을 자신의 노동에서부터 찾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노동이 평생 이어져야 한다는 비극을 떠올릴 때마다 당장 내일이 두렵다.  알바생은 노동하는 세상의 부조리를 내 세상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꿈의 시간과 여력이 남아있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모조리 내 것 같아서 유별나지 않게 유별난 욕들을 입에 담아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다. 그래야지 내일 가야 할 일터를 에이 씨발 하면서도 갈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내가 알바생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욕을 못하는 사람이였다. 스무 살 초반, 잠시 연극을 배웠을 땐 욕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연극 선생님으로부터 심한 욕을 들어야 했다. 누군가의 욕을 모방한 적은 있었겠으나 내가 가진 분함과 설움으로 욕을 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씨발’이 없는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삶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욕하는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다시 연기를 꿈꾸기 위한 순진한 에너지가 온데간데 없다.

 화장실에서 변기를 내리고 바지를 훔치면서 긴 한숨과 함께 그 날의 욕을 시작한다. 그것을 밑바탕으로 나는 좀 더 대견할만한 말들을 자주 하게 되었다. 재수 없는 손님이 가고 나면 한숨 대신 저런 썅년이(bitch) 또 왔다고 사브리나랑 한바탕 뒷담화를 한다. 주방에서 일하는 Joel은 줄곧 내 실수를 크게 부풀리며 흠잡기를 좋아해왔는데, 어느 날부터 나는 그것을 조용히 듣는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if you give me a shit, Ill git you a more shit! Don’t’ fucking do that to me. Okay?’ 보스가 화장실을 청소한 것 맞냐며 왜 이렇게 더렵냐고 따져 물어도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는다. 어깨를 한 번 들썩하고 그 자리를 뜬다. 그럼 자기가 한다. '할 줄 알면서 지랄이야.' 미안해하기 시작하면 내 작은 미안함을 자꾸 근엄한 얼굴을 하고서 이용해먹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10시간을 서 있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마주쳐야 하는 구겨진 얼굴들과 그 구겨짐에서 풍기는 표정과 말들을 걸러내야 하는 일, 때때로 싸워내야 하는 일을 지나오면 뭐 이렇게 먹고 사는 일이 거지 같은가 싶다. 그 한가운데를 내일도 통과해야 한다는 떠올림은 매번 괴롭다. 사브리나는 말했다. 일을 할 땐 마음이 좋아서도 안되고, 몸이 부지런해서도 안돼. 그럼 너무 힘들거든. 적당히 해 캐런.


 일을 그만두었다. ‘적당히’를 가늠할 수 있는 노련함을 나는 잠시 포기하기로 했다. 한동안 돈은 벌 수 없지만 숨은 크고 고르게 쉴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책읽기, 나만의 달리기, 나만의 일기쓰기, 나만의 비건 요리, 나만의 카페행 같은 것들을 맘껏 할 예정이다. 노동자의 신분을 지켜내는데 온 정신이 팔리는 동안, ‘나만의 것들’이 곧잘 무시 받고 침범 당해왔다. 나는 언제나 삐뚤어지고 삐딱한 인간을 동경해왔기 때문에 노동이 나를 ‘쌍욕하는 인간’으로 몰아붙여도 그건 괜찮은 일이였다. 그것에는 일종의 해방감도 끼여있다. 그러나 노동이 나를 ‘쌍욕으로 점철된 인간’으로 주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된다.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내 자신을 위엄 있게 쳐다보는 일이 쌍욕에 묻혀버린다면 나는 내 인생을 두고 비극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위엄은 쌍욕과 공존하는 것이 좋다.


 노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어떤 인간은 고상하기만 해도 된다. 고상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 속에만 놓여 있을 테니까. 그런 인간은 노동자의 매서운 눈빛을 두고 무식하다고 무시하기 쉬운데 정작 무지한 자는 본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모를 수 있을 만큼 뭘 모른다. 그들이 싸워야 할 것은 과잉된 풍족으로 인해 생겨난 무지이다.

 노동을 해야만 생존 가능한 대부분의 인간이 싸워서 지켜내야 할 것은 위엄이다. 개인적인 위엄을 포기하는 순간 노동자에게는 더 전락해야 할 지하가 남아있다. 지상에 머물기 위해서 노동자는 노동자라는 자아를 썼다 벗는 일을 해야 한다.  고상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칠고 상스러운 동시에, 돌아온 집에서 내 위엄을 지켜낼 만한 샤워를 하고 좋은 것들을 읽고 사랑이 담긴 언어를 주고 받아야 악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있다.  


 200년도 전에 오언은 ‘ 하루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놀기’를 주창했다. 하루 16시간쯤 되는 노동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던 18세기에, 노동자가 아닌 방직 공장의 사장이 내걸었던 슬로건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 8시간 노동이 ‘꿈’인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살고 있어서 놀랍도록 슬프다.

 오언도 분명 노동자의 위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루에 16시간 일한다는 것은 자고 일어나서 일만 하다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는 일인데, 그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다.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노동자를 좀 더 수월하게 이용해먹는 치사한 일이다. 오언은 하루 8시간 노동의 효율성을 강조했다. 충분한 휴식으로 노동자들이 잘 집중하기에 짧은 노동시간이라 할지라도 긴 노동에 뒤쳐지지 않는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장들을 구슬릴 수도 있을 논리이나, 나는 경제적 합리성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다. 나는 하루 8시간 일하는 노동자가 나머지 16시간을 각자 어떤 모양으로 쓸 수 있을 지가 궁금하다. 종이 접기를 하는 인간,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인간,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인간,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인간, 팔 굽혀 펴기를 하며 고양된 팔 근육을 쳐다보는 인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 받는 노동자의 엿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 각자가 빚어내고 싶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여력과,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모든 부조리가 좀 덜 엿 같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말한 ‘노동’은 블루 칼라에 한정된 것이었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이 겪어야 할 수모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내겐 깨끗하고 반듯한 옷을 입고 사무실 의자에 앉아 일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주방 경력이 20년쯤은 거뜬히 되는 주방 이모들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5년쯤 되는 블루 칼라 노동을 해보고 나서 그쯤 되는 이야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쯤 되는 이야기라서 누군가로부터는 ‘아이고 정말 힘들겠다. 네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는 오글대는 동정을 얻을 것이고 누군가는 웃기고 자빠졌네 같은 소리를 할 것 같다. 전자는 그냥 웃어넘기겠는데, 어떤 주방이모가 내 이야기를 듣고 건방지다고 손가락질 한다면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넙죽 숙이고 꿀밤이라도 쥐어먹어야 마땅할 것임을 안다.


나만의 것들? 나만의 책읽기? 달리기? 웃기지 마. 네가 진짜 노동자라면 그런 것도 몰라. 그냥 밥이라도 먹고 살면 되는 거지. 밥이라도 먹고 사는데 온 몸이 쓰이다 가는 거지. 더 내려가야 할 지하? 너는 지상에나 거기 있어라. 그러나 지하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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