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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책 <지상의 노래> 를 읽고

이동진의 이승우를 위하여

‘많은 분들이 이승우 소설은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시나요?’ 이동진이 물었다.

 ‘제가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카뮈의 이방인은 하난데, 그걸 읽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방인이 있을 거잖아요. 어떤 사람은 ‘지상의 노래’를 두고 지독한 연애 소설이라고 해요. 그건 읽는 독자의 몫이에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기독교적이라고 한다면 그걸 받아들이는 거죠. 사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고요.’ 라고 이승우가 답한 것 같다.


 ‘지상의 노래’는 숨겨져 왔던 어느 수도원의 벽서가 세상에 알려지며 시작되는 소설이다. 그 모든 벽서는 성경을 옮겨 적은 것이였다. 가장 중심축이 되는 두 인물은 각자 어떠한 계기로 성경에 의해 살아가게 되고, 결국 하느님의 말씀에 파묻혀 죽기로 결심한 인물들이다.

 누가 이렇게 소설을 요약해버렸다면 내가 이 소설을 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하느님의 말씀에 파묻혀 죽는 건 너무 하지 않나?

 나는 이동진을 너무 좋아하고 이동진은 이승우의 소설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오직 이동진을 향한 팬심으로 '지상의 노래'를 읽기 시작했다. 내게 ‘지상의 노래’는 하느님의 말씀에 파묻혀 죽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애 소설적이지도 않았다. 

 이 소설은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였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불교 법난이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정치 권력에 의해서 박해 받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므로 작가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를 상정하고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 이 이야기는 ‘하느님 앞에서의 죄인’이 아니라 ‘생 앞에서 죄를 짓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니다. 이동진의 말처럼 죄를 짓는 것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엄연히 다르므로, 소설 ‘지상의 노래’는 ‘생 앞에서 죄를 짓고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게 옳겠다.

 이승우는 또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죄의식이 인간됨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세태에서는 주체적 자아가 너무 중요해져 버렸어요. 자기 긍정과 확신이 너무나 올바른 것이 되어버렸죠. 사람들이 너무 자신만만하게, 당당하게, 떳떳하게 사는 것 같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내숭이라도 좀 떨고 위선이라도 좀 부렸으면 좋겠어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교회에서였거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게 틀림없다. 내가 기억하는 그 음성은 복심에서 우러나오는 꾸짖음이였다. 어렸을 적임에도 분명하고 그 목소리와 말에 대해 내가 가졌던 저항감을 기억한다.

 내가 죄인이라면 그것은 내게 권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죄인이라 칭하는 너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랬을 때 하느님의 권력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고, 하느님이 아닌 자들이 하느님의 권력으로 호가호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의 설교를 듣는 그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될 때 누구보다 편하고 달콤할 수 있는 사람은 목사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을 자처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삶 속에서 언제나 내가 어떤 죄를 짓고 살고 있다는 것만은 안다. 내 욕망을 위해서 다른 이의 마음을 짓밟은 적이 있음을 알고, 내 편리함을 위해서 내가 살고 있는 땅에 몹쓸 짓을 많이 했음을 알고, 내 작고 나쁜 행동쯤은 큰 탈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소심하게 생각하면서 나쁘지만 작을 뿐이라고 믿으면서 분명히 나쁜 어떤 행동들을 한 적이 있음을 안다. 눈 위에서 웅크려 자고 있는 홈리스를 그냥 지나쳤으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많다. 탐욕을 욕하면서 탐욕을 탐한 적이 많다. 옳은 일이 뭔지 알면서 옳은 일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한 적도 많다. 부정한 일을 보고 조용한 적이 많고 부정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도 가만히 서 있었던 적이 많았을 것이다.

죄책감은 무서운 것이다. 들여다볼수록 내가 왜 당당한 사람이 되면 안 되는지 나는 왜 고개를 숙이는 일이 많아야 하는지 알게 되는 무서운 인간됨이다.

그러나 죄책감은 나를 살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욕망과 이기심을 내게 반사시켜 보여주는 일을 죄책감만이 할 수 있다. 쑥쑥 자라기만 할 것 같은 욕망과 이기심도 이 무거운 죄책감이 고개를 들고 쳐다볼 때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더는 자라나지 못할 때가 내 안에서 생긴다. 때로는 욕망과 이기심이 가뿐히 죄책감을 물리치는 일도 생긴다. 그것은 안타깝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죄책감이 언제나 사후적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내 욕망과 이기적인 마음과 경솔한 말과 해치는 행동이 있고 나서야 죄책감은 내게 좀 덜 나쁜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나를 내리끈다. 나는 죄책감의 방에 내려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너무 오래 있을 수는 없다. 나는 금세 죄책감 따위는 잊어버리겠지만 언제나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지 좀 덜 나쁜 인간이라도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것이 그나마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이 굉장한 것은 현실을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기 때문이에요.’ 소설 속 한정효가 후에게 하는 말이다.

 다시 돌아온 천산 수도원에서 후는 한정효를 다시 마주한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한정효가 다른 형제들을 묻어준 것처럼 후는 그의 마지막을 지키고 그를 묻어준다. 그리고 그는 한정효가 해온 대로 성경들을 벽에 이어서 쓰기 시작한다. 지하의 마지막 방에까지 말씀들을 이어 쓰는 일을 다했을 때 그는 그 자신도 매장시킨다. 그의 시신은 두개골이 밖으로 나온 채 매장되어 있다.   

 현실을 넘어선다는 건 뭘까.

 소설가 이승우는 '그곳'이 어딘가에 확실하게 있거나 그곳에는 좋음이 보장되어 있어서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패할지 모르고, 어쩌면 실패가 보장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죄책감이 인간됨의 기본이라고 말했던 그다.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죄책감을 품고서,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곳을 향하는, 갈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실패가 보장되어 있을 그곳으로 가 닿길 추구하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지상의 노래’에 살고 있고 이승우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에도 살고 있나 보다.

 그래서 현실을 넘어서려는 사람들은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너무 잘 아는 사람들 아닐까. 현실을 넘어서거나 말거나는 더 이상 문젯거리가 아니다. 넘어설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넘어서기 위해 가는 삶 자체에 모든 중요함이 있다. 그곳이 어디든 그곳으로 넘어서기 위해 가는 삶 자체가 현실을 넘어선다는 말이 가지는 진짜 의미 아닐까.      


 내가 이동진을 좋아하는 이유와 이동진이 이승우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다. 그는 언젠가 학생 때 배가 고파 음식을 찾는 자신의 식욕을 마주하기 괴로워서 한동안 급식 시간에 물로 배를 채운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느꼈던 괴로움에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동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 말은 내게 이렇게도 들린다. 이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 나는 여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걸어가겠다. 이곳은 죄가 많고 그곳은 또 내가 실패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걸어갈 수 밖에 없다.  


현실을 넘어선다는 것은 어떤 불가능에 대한 신비적인 힘의 발현이 아니다. 현실을 넘어선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 실존을 직시하는 일이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걸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지상의 노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옮겨 적으면서 독서 일기를 마친다.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린 후에 남는 생의 공허를 어쩔 것인가.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은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한다.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삶 때문이다. 일을 위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끝남과 동시에 삶이 끝나기도 한다. 일을 끝냈으므로 삶을 끝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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