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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일기] 근육을 만들거야.

다짐 일기

근력 운동을 제대로 하면 내 몸 안에서 근육 조직은 찢어진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내 몸은 자생력을 발휘해 찢겨진 근육을 봉합하고자 한다. 봉합되는 과정에서 근육은 좀 더 크고 튼튼한 것으로 회복된다. 이렇듯 근육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손상과 회복의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근육이란 단백질을 많이 먹고 운동을 많이 하면 커지는 무엇일 거라고 막연히생각해왔는데, 찢어져야 한다니. 

근육의 생성과정 속에는 분명 내가 반할 만한 순간들이 있었다.


  '근육은 찢어져야만 한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남자친구는 운동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운동을 신성하게 받드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같이 사는 나 같은 사람은 눈치가 보여서 달리기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학아, 내가 오늘 3km를 16분 20초에 끊었어. 대단하지?’ 

‘3km? 가뿐하게 15분 잡아야지. 이제 네 목표는 15분이야.’ 

‘너는 어떻게 15분을 입에 올릴 수 있어? 난 숨이 끊기는지 알았다고.’ 

‘바로 그거야! 숨이 끊길 것 같은 지점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 거야.’ 

  운동에 관한 한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끝난다. 스쿼트를 할 때도 그는 내게 ‘하나 더’를 주문하고, 팔 굽혀 펴기를 할 때는 가슴이 바닥에 닿을 것처럼 내려가지만 결코 닿지 않은 채 밀고 올라서는 정석 자세만을 인정한다.  

 나는 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을 굉장히 두려워해서 되도록 몸을 사리는 쪽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운동을 하면서 내 몸의 어느 부위가 조금이라도 아플 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미련 없이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간다.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 근육이 찢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울컥했다(내 울컥 포인트는 생뚱 맞을 때가 많다). 그것과 유사한 울컥을 달리는 런닝 머신 위에서도 겪은 적 있었다. 

그것은 숨이 끊기고 근육이 갈라져버릴 것만 같은 지점, 거기까지 가보는 일을 내가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해버렸다는 각성 때문이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포기하는 쪽이 매달리는 것보다 낫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들이, 아무래도 근육이 없어서 놓아버린 것들이 운동을 하면서 생각났다.  내 자신을 원망할 수 밖에.

그 날 나는 런닝머신 위에서 평소보다 훨씬 오래 뛰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나를 위로해주는 일은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이고 그 자리를 좀 더 지키는 연습 중이다. 달리기를 할 때는 걷지 않기로 한다. 스피드 7을 넘어서 7.5와 8의 속도에서도 뛰는 일을 한다. 근력 운동을 할 때는 같은 동작을  8번 하는 것을 목표로 9번을 해본다. 9번째 움직임을 끝내고 나서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 팔 굽혀 펴기라도 이어 해본다. 혹시나 내 안에서 찢어질 근육을 기대하면서. 내 근육이 이번에는 놓지 않을 무엇을 상상하면서.  


 '근육 손상 후에는 회복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

 이 때 휴식이란 몸의 휴식을 말하겠지만, 운동을 할 때 내게 정말 필요한 휴식은 마음의 휴식이다. 

 내가 몸을 지극히 사리는 와중에 내 마음은 급한 욕심들을 잔칫상 벌이듯 펼쳐내며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근육질의 언니들을 보면서 하루에 두 번씩은 운동을 해야 나도 저렇게 되려나? 같은 생각에 초조해하고, 아무리 시도해봐도 깨알도 안 먹히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은 풀업 동작을 연습하면서는 울컥 화가 난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지금쯤 하나는 성공해야 하는 것 아냐?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무엇이 쉽게 주어진다면 그것의 진정성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과 무엇이든 쉽게 성취할 수는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 막상 몸이 그 어려움을 겪어낼 때 머리 속의 앎은 무용해진다. 찢어짐을 당하는 것도 몸이고 마음의 앞섬을 벽에 육박해 깨닫는 것도 결국 몸이 하는 일이다.

 근육이 태어나기 위해 내가 견뎌야 하는 고통을 모른 채 하면서 근육을 빨리 만들고 싶다는 내 마음은 그래서 얼마나 어리석었나.

 나는 잠도 잘자고 먹는 것도 너무 잘 먹어서 탈이라면 탈이다. 내가 신경 써야 할 휴식이란 자꾸만 앞서가려는 마음을 거둬들이고 사이를 삐져나오는 욕심들을 잡아들인 뒤, 깊고 고른 호흡으로 제정신을 차리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내 찢어짐 이후의 근육은 더 크고 단단한 무엇이 되어 있다.' 

그것은 다시 다가올 고통을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내 근육은 아직 찢기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나는 크지도 단단하지도 못해서 매번 어디선가 날아오는 주먹질에 당하고만 있는 중이다.

 혼자서 근력 운동을 해온 지 5개월차다. 여전히 내 스쿼트 최고 기록은 5개월 전과 같은 135LB, 3RM에 머물러 있다(135파운드를 들고 3번 앉았다 일어설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게를 늘이거나, 앉고 일어나는 반복 수를 늘려야 한다. 현재 목표는 135LB를 들고 8RM을 해내는 것인데, 앉아야할 그 4번째의 순간에 앉지를 못한다. 혹시 내가 폭삭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닐까 겁이 나서 앉을 수가 없다. 

 다시 고통이 올 것은 분명하다. 그것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다. 아니 나는 맞설 수는 없을 테니까, 그것에 쓰러지지 않을 만큼의 힘을 갖는 것만으로도 족하겠다. 그러려면 8번 앉았다 일어서기 쯤은 반복할 수 있어야 할텐데.  

 과연 내일 나는 스쿼트를 하면서 그 4번째의 순간에 엉덩이를 뒤로 내빼며 앉을 수 있을까. 내 두 발바닥으로 바닥을 힘껏 밀어내며 으악 일어설 수 있을까.       


 '운동을 그만두면 근육도 사라진다.' 

 생성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다. 근육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운동을 지속할 수 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지속할 때 근육은 계속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삶 또한 행동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생각과 말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몸을 움직일 때 생겨난다. 행동의 지속성이 없을 때 모든 것은 겉치레일 뿐이고 실제는 비어버린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헬스장으로 출근하는 중이다. 

 여자도 가질 수 있는 울퉁불퉁한 근육의 매력에 빠져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근육이 생기면 지방의 자리가 줄어든다는 사실은 더 매력적이었다. 운동을 잘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하루 9시간씩 서서 일하는 노동 이후의 운동은 근육을 만들기보다 근육을 늙어버리게 하는 기분이었다. 오랜 노동에 지친 나는 노동에 먹히지 않기 위해 일을 그만두는 만용을 부렸다. 한 달 여남은 노동으로부터의 도피 기간 동안 나는 돈을 벌지 않는 대신 근육을 키워나갈 예정이다. 쓰러지지 않을 맷집을 키울 예정이다.

3KM를 15분에 달려내는 날이 오면, 135LB를 8번 들고 일어서는 스쿼트를 해내는 날이 오면 나는 나를 좀 더 믿어줄 수 있을까. 

 믿음까지는 아니라도 언제나 다시 올 그 고통 앞에서 조금 더 튼튼하고 담담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은 성냥값 같아서 너무 소중히 다루면 우스운 사람이 되고, 너무 함부로 다루면 큰 일 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운동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열렬히 예찬한 뒤, 우스운 놀림을 받기로 했다. 그것을 함부로 무시하기엔 너무 많은 힘들이 그곳에 있고 지금 나는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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