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 Apr 08. 2020

영화 <결혼 이야기> 를 보고

내 사랑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랭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시인 황인찬은 이런 말을 한다. ‘랭보가 그런 말을 이미 한 줄  알았더라면 사랑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을 건데요.’ 그의 새 시집 제목은 ‘ 사랑을 위한 되풀이’다.


 사랑의 재발명을 말한 사람이 랭보가 맞는지 확인해봐야 했다. 그러다 신형철의 시 평론을 하나 읽게 되었다. ‘무정한 신 아래서 사랑을 발견하다.’ 그의 글을 이미 읽어버려서 나는 이제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수도 있었을 말을 잃었다. 사랑에 유사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로 한다. 사랑이 전혀 아닐 수도 있는 것에 대하여.


1 ) 사랑 폭식증

 그의 짙은 눈썹 아래에 두 눈이 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할 때 그의 두 눈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고 가난한 것이다. 그가 두 눈으로 쳐다볼 때 나는 가슴이 벗겨지는 것 같다. 인형을 열면 조금 더 작은 인형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러시아 목각 인형처럼, 그의 눈 깊숙한 곳에 사랑이 사리처럼 실존할지도 몰라. 눈이 말보다 더 진실할 때 사랑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믿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용한 말인지 아주 많은 사랑을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가영아. 그가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준다.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용한지 알게 된 후로도 사랑한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때가 계속해서 생겼다.


그에게 사랑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내가 전부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눈을 열어젖히고 사랑을 만지려고 들 때마다 그가 잃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사랑을 만질 수 없었고 가질 수 없었다. 허탈해하며 그를 쳐다봤는데 그의 두 눈은 빨갛고 아픈 것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후려친 자국들이 선명했다. 그는 사랑을 파먹으려는 괴물 한 마리를 보고 있었다.


사랑은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나는 밥을 먹을 때 뿐만 아니라 사랑을 먹을 때도 폭식하는 인간이였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른 말을 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고기를 먹는 일을 포기한 것처럼 사랑을 먹는 일을 포기하기로 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사랑을 발명하지도 못하지만, 사랑이 먹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 일까. 나는 네가 없어도 잘 살아보려고 애쓰겠다고 말했다. 또 나는 네가 있어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열등하지 않고 밥을 맛있게 먹고 싫은 사람 욕을 하고 신이 나면 호들갑스러울 수 있다. 네가 내 옆에 없다면 나는 열등한 채로 그것들을 연기할까. 네가 내 옆에 없다면 나도 ‘더는 못 살 것 같아서 곡기를 끊겠다’고 말할까.   



2) 완고하게 불완전한, 영화 ‘결혼 이야기’

 찰리는 자신에 대해 쓴 니콜의 글을 아들과 함께 읽는다.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I’ll never stop loving him, even though it doesn’t make sense anymore.’ 두 사람이 이혼을 ‘해내고’ 각자의 삶을 시작하면서 이 영화는 끝난다.


 영화 ‘결혼 이야기’는 2초 만에 시작된 사랑도 얼마나 못난 것이 되어버릴 수 있는지, 사랑하는 날들 속에 사랑하지 않는 날들이 얼마나 쉽게 끼여들 수 있는지, 그렇게 ‘사랑하는 관계’가 끝나고도 ‘사랑’ 이란 관념이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없는 말이긴 하지만, 언제나 찰리를 사랑할 것이라는 니콜의 진심을 나는 알 것만 같았다.


 나도 언젠가 애인에게 그런 말을 했다. ‘ 너랑 헤어지는 일이 생겨도 계속해서 너를 사랑할 것 같아.’ 애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계속해서 사랑할 것이라면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기어코 살아남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하는 한 자아의 이야기로 영화를 읽어본다면 애인은 내 말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니콜’은 찰리를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녀 안에 죽은 줄 알았던 어떤 감각이 뜨겁게 되살아났다. 그를 사랑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며 산다. 대신 그는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 옆에서 그녀는 자기 목소리를 잃어간다고 느낀다. 남편을 지지하는 현모양처로 사는 어느 와이프의 삶을 그녀는 경멸한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 수가 없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욕망과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그녀는 떠나기로 한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물을 줄 수 있어서 각자가 각자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되는 결말은 극히 드물다.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린다면, 이건 어떤가. ‘나라도 곁에 있어서 살게 하는 일.’ 어쨌거나 두 일 모두 드문 일이긴 하다.


 나는 오랫동안 애인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왔다. 연애를 잘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모든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오직 진실만 줄 수 있다고 믿었다(진실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노래 가사의 환상까지 믿었다. 언젠가 내가 너를 빛나게 하고 너도 내가 나는 것을 아름답게 바라봐 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사랑했다. 내 사랑의 콩깍지를 벗겨내는데에는 6년이 걸렸다. 


 맨 눈으로 보는 사랑은 잔인하다. 사랑 앞에 서 있는 나는 안타깝고 볼품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도 물을 잘 못 주는 사람이면서 그에게서 물줄기를 바랬다. 때로는 그에게 너무 많은 물을 줬다. 줬다고 믿었다. 그가 피우고 싶은 게 뭔지도 몰랐으면서. 내가 그를 모른다는 진실과 우리는 내가 원하는 우리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여러 번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이는 침을 삼켰다. 사랑을 먹을 수 없다는 좌절 이후로 사랑이 완고하게 불완전하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또 다시 계속된 포기가 뒤따라야 했다.


 사랑은 완고하게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떠나는 일이 그것을 지켜내는 일보다 빈번하다.


 내게 사랑을 지켜내는 일은 사랑에 대한 내 강요를 포기하는 일이고, 남은 에너지로 그의 옆에 남아있기로 하는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사랑의 콩깍지일까. 이걸 벗겨내는 일에는 몇 년을 쓸까.


 언제나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 떠나는 것보다 나은 일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그것을 지켜내기로 결심할 때, 다른 하나는 그것을 방치할 수 밖에 없다면 다른 하나는 서둘러 짐을 싸야 하지 않나. 그래서 니콜은 떠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분명 찰리가 두 사람의 이혼 원인에 있어 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찰리의 탓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랑 자체가(이 영화에서는 ‘결혼’ 자체가) 너무 모순되고 성가신데, 근데 너무 살아있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혼이 끝나가는 후반부에서 찰리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가장 분명히 드러낸다. ‘날 너무 잘 아는, 날 너무 필요로 하는, 나를 잡아끌어내리고 지옥에 가두기도 하는, 그러나 내가 살아있게 하는/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내게 찬사를 먹여주다가 나를 이용해버리고 마는, 그러면서도 내 나날들을 색칠해주는 그대여/ 나는 이 모든 것에 당신 만큼이나 놀란 눈을 하고서 당신과 함께 살아남겠소, 살아가겠소/ 혼자는 혼자니까, 그건 사는 게 아니니까.’  




3) 나라도 곁에 있어서 살게 하는 일.

신형철 평론가가 한겨레에 연재했던 격주 시화 중 한 편인  ‘무정한 신 아래서 사랑을 발견하다’를 꼭 찾아 읽어보길 권한다.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사랑’과 ‘슬픔’에 대해서 가장 적확하게 말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숙연해진다. 그것을 다 읽고서 고개를 숙이는 의식을 치룬다. 그의 글은 가장 멋지게 나쁠 수도 있는 글쓰기의 범람에서 등대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글을 쓰고 싶지 않고 좀 더 제대로 된 인간이 되고 싶다.  


‘무정한 신 아래서 사랑을 발견하다’라는 칼럼은 이영광의 시 ‘사랑의 발명’에 대한 그의 해설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수록




 애인에게 말했다. 지구가 멸망하는 날 나는 너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너를 안고 멸망하는 지구를 맞이하겠다고 말했다. (애인은 전혀 다른 결말을 원할지도 모른다.)


나는 애인과 함께 ‘죽을’ 상상을 해본 적 있으면서, 내 곁에서 애인을 ‘살게’ 할 일에 대해서 당황스러울 만치 무지해왔다. 시 ‘사랑의 발명’과 신형철의 칼럼을 읽고 나는 지금껏 내가 이해해오지 못한 사랑의 한 형태를 이해하게 된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네가 더는 못 살 것 같을 때가 생긴다면, 나는 네 옆에 서서 너를 위한 사랑을 발명해야만 하는 책임을 기꺼이 지는 사랑을 말이다.      


 내게도 가능한 발명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멸망을 함께 하고 싶은 내 마음의 바탕을 생각해보면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그를 떠나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들을 쌓아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결심이 사실 무섭다. 무서워서 쳐다보지 말자고 했는데, 저기 누군가는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하기로 한다.


 애인, 나라는 한 인간은 당신이라는 다른 한 인간을 만났소. 우리는 불쌍한 인간들이오. 우리는 불쌍하고 엉망이기 쉬운 인간들이오. 당신이 너무 없어서 죽고 싶을 때 내가 뭐라도 발명해낼 수 있다면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면 훔친 마음을 다시 세상에 옮겨 놓을 수 있다면 나는 다시 당신을 위해 사랑을 발명하겠소.


그러나 애인, 당신이 언젠가 불쌍한 인간이 아니게 될 때, 원하는 게 너무 많은 인간이 되어버릴 때, 그래서 내 발명 따위야 구르는 돌처럼 걷어차는 인간이 되어버릴 때, 그럴 때 나는 어찌하면 좋겠소.


 의심이 편한 인간인 내게 신형철의 칼럼은 사랑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상이 되었다. 


 이 글은 내 사랑의 과거와 현재와 꿈꾸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의 이전글 칼럼 <8시간 노동의 험난한 여정>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