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 Apr 08. 2020

영화 <두 교황>을 보고

 초등학생 때는 교회에 가면 맛있는 걸 준다는 친구 말을 믿고 교회에 다녔다. 떡볶이가 지겨워질 즈음 교회를 그만 나갔다. 남양주에서 한달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을 때도 모태 신앙이라는 친구의 끈질긴 부탁에 이끌려 두어 번 일요 예배에 참석했다. 비싼 과자를 얻어 먹어서 좋았다. 호주에 있었을 때도 플랫 메이트를 따라 한인 교회에 가서 비빔밥을 얻어 먹은 적 있다. 그럴 때마다 놀라웠다. 교회는 어디서 떡볶이와 과자와 비빔밥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줄 돈을 벌까? 이걸 먹기 위해서 들어야 하는 저 목사님의 이야기들은 어쩜 하나같이 지루한 억지가 묻어 있고 내 닭살을 돋게 하는 걸까?


 '짜라투스투라는 말했다’에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니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쌈박했다. 적어도 니체는 내 입에 단 것을 물려주고 전체주의적인 말을 퍼부으며 나를 교화시키려고 들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내 하느님은 니체였다.


 영화에서 베르고글리오는 말한다. ‘Life he gave us is all change. Nothing is static in nature, or the universe. Not even god.’ 


 베르고글리오의 저 말을 듣고 작년에 읽었던 ‘모든 것은 빛난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만물이 신이였던 그리스의 다신교, 유일신, 신의 죽음(니체)을 거치면서 현대사회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 인간이 어떻게 하면 다시금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답을 찾는 책이였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저자는 다신교로의 복귀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꽃, 나무, 돌, 바다, 하늘, 만물에 신이 깃든 것처럼 여길 때 의미는 다시금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였던 서문의 한 구절을 옮겨 적는다. 


“All things are not shining, but all the shining things are(모든 것이 빛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빛을 비추는 것들은 모두 빛난다).” 


 유투브에서 본 영상에서 어떤 무신론자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나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마치 모든 게 신인 것처럼 여기며 삽니다.’ 교황과 다신교와 무신론자, 그들은 각각 다른 믿음을 지녔으면서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절에서 명상을 배우며 두 세달 지낸 적이 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눈을 감은 어둠 속에서 내가 만든 종소리를 듣고 끝이 없을 소리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신기하게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빛이 생기고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빠 다리로 앉은 채 물을 건너고 산을 지나치고 별에도 가고 우주여행도 갔다. 


 '나는 여기 이런 몸으로 갇혀 앉아 있지만, 결국엔 나랑 물이랑 산이랑 별이랑 우주랑 다를 것 없는 것 아닐까.' 


명상이 끝나면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어마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처럼 불교신자도 되지 못했다. 내가 한 명상법이 무엇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모른다. 절에서도 교회에서 맡았던 꿉꿉하고 의문스러운 냄새들이 났기 때문일까. 여전히 내게 신은 없었지만, 그 당시 그 명상이 굉장히 획기적인 상상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후로 나는 나와 내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상상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내가 어떤 것들을 함부로 짓밟는 일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절에서 내가 했던 ‘경계를 지우는 명상’은 책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말하는 ‘빛을 비추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고, 어느 무신론자의 '모든 걸 신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와도 닮아있다. 신조차도 고정된(static) 무엇이 아니라고 말하는, 신을 어디서 찾느냐는 물음에 ‘on the journey?’라고 대답하는 베르고글리오의 생각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나는 본다. 


영화는 분명 신이 모든 것인 두 교황에 대한 이야기인데, 베르고글리오라는 인물 덕분에 영화 속에서는 어떤 신도 차별당하지 않을 것 같다.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 등등 내가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이유는 신의 부름을 겪은 경험이 없어서 일 수도 있고, 교회와 절과 점집에서 맡았던 야릿한 돈의 냄새 때문일 수도 있다. 파렴치한 짓을 하고서 하느님께 용서 받았다는 용서해서는 안되는 괴물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쨌건 내 나름대로의 이유로 나는 신을 믿지 않으나, 내 주변에서 끈임없이 변화하는 사람들, 동물들, 생물들, 사물들에 빛을 비추는 상상은 나를 매혹시킨다. 신은 없지만 내 옆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이 신을 대하듯 신성하게 비추는 행위가 내겐 종교여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신에 대한 말은 그만하고, 인간에 대해서 좀 말하고 싶다. 


 영화 ‘두 교황’은 같은 신을 다르게 믿는 두 성직자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두 노인의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라칭거는 신이 있었기에 한 번도 외로워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베르고글리오는 독신은 축복이 될 수도 있지만 저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라칭거는 오래도록 지켜왔던 전통이 다른 누군가의 의해 깨어질 것이 못마땅하지만, 베르고글리오는 전통도 깨어져야 한다면 마땅히 깨트리는 게 옳다고 말한다. 라창거는 혼자서 밥을 먹고, 베르고글리오는 식사는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칭거가 재미없어도 되는 독일인의 농담을 하거나 농담하길 그만두라고 종용할 때 베르고글리오는 끊임없이 농담을 건네고 웃는다. 라징거가 '오직 유일한 진실(unchanging truth)'을 말할 때, 베르고글리오는 '사랑이 없는 진실'은 소용없다는 대답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베르고글리오는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우리 내부에 벽을 쌓아 올리고 눈을 멀게 하는 나르시즘이라는 것을 호되게 비판할 줄 아는 동시에 탱고를 추고 축구에 열광하는 삶의 즐거움마저 아는 균형 잡힌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 반대 편에 앉아 있는 라칭거는 눈과 귀가 조금씩 어두워져버린 보수적이고 딱딱한 사람같기만 하다. 나는 이 영화가 베르고글리오가 이긴 채로 끝나는 영화겠거니 했다.


 영화가 거의 끝나갈 쯤에야 두 사람은 각자의 반전을 드러낸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좋은 사람이었을 것만 같은 베르고글리오에게도 과거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시절, 그는 교회의 전통을 지켜내기 위해 독재 권력과 타협했다. 자신의 권위에 거스르는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밀어냈다. 그 때 그는 ‘사랑이 없는 진실’만을 지켜낸 결과로써 소중한 동지들을 잃었다. 정권이 교체된 이후로는 자리를 박탈당하고 시골로 좌천 당했다. 일부는 아직까지도 그를 배신자라고 부른다.


 '변화’라는 말에 줄곧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던 라칭거는 드디어 변화한다. 라칭거는 삶에서 즐거움을 찾을 용기를 갖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후회한다는 고해성사를 시작한다. 교회 내부의 부패에 대해서 고백한다. 그것을 모른 척했던 자신의 타협을 시인한다. 교회를 개혁하는 일이 자신이 가진 믿음으로 바꿀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하고 교황의 자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베르고글리오지만 그에게 다음 교황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치명적인 과오로 오래도록 힘들어하는 베르고글리오에게 다음과 같은 말까지 해준다. ‘You must remember that you are not god. We live in God, but we’re not of it. We are only human.‘ 변화는 타협이라고 고집스럽게 말했던 그 노인이 이 노인이 맞나 싶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기만 한 것 같은 두 사람이 서로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면서 그것을 끌어안아주는 장면은 벌거벗은 두 늙은 인간의 초췌함이 아니라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을 하기 위해 끝까지 애쓰는 성숙한 두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보였다. 내게 그것은 신이 아니라서 불완전한 인간들의 서로를 향한 다독거림이였다.


 대결적인 눈빛과 티격태격 말싸움을 주고 받던 두 노인이 영화의 결말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는 친구 사이가 되어 있었을 때, 생각해봤다. 아 나도 팔십쯤 되었을 때 결코 어떤 부분에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와 포옹할 수 있을까. 그와 웃으면서 음식을 나눠먹을 수 있을까. 


 친구에게 새해 인사를 했다. 그는 내게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서 수고가 많았다고 말했다.


교황들도 저렇게 불완전한데 속세에 사는 우리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완패할 삶을 살지 상상하기에는 불완전함의 깊이가 너무 끝이 없다.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잘할 자신이 있는 일은 그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다. 어떤 고백은 나 자신에게 하기도 힘들어서 외면하고 싶고 만다. 그러나 누군가 내 옆에서 자신의 못난 모습을 말하면서 무너지고, 일어나서 반성하고, 화를 내다가도 마음을 다잡으려는 눈빛을 반짝일 때마다 나는 그런 인간들이 조금은 아름답다고 생각된다. 이렇게라도 생겨먹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게 된다.


 나는 그의 얘기를 오래도록 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장했다. 그 또한 나의 얘기를 오래도록 들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실패하지만 조금은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게 아름다운 이야기란 불완전한 당신을 안아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런 영화를 함께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결혼 이야기> 를 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