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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책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록산 게이 저

누가 나를 두고 페미니스트냐고 물어올 때마다 귀에 날벌레라도 들어온 듯이 고개를 날쌔게 흔들면서 맞받아쳤다. 

아뇨, 나 페미니스트 아니에요. 그리고 매번 조금 화난 듯이 되물었다. 도대체 페미니스트가 뭔데요?


 나는 페미니즘을 스타벅스 커피쯤으로 여기는 여자들이 싫었다.

‘저는 남자들이 여자를 성적 대상화하는 걸 참을 수가 없어요, 거기다 은근히 결정권을 잡아 쥐는 것도요.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도 싫고,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도 너무 싫어요. 근데 있잖아요, 결혼은 돈 많은 남자랑 해서 좀 편하게 살고 싶어요.’

 적당한 자주권과 독립심을 회복하는 연기를 통해 실현하고 싶은 꿈이 신데렐라가 되는 것이라니. 나는 그녀들이 한 손에 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종이컵을 들고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을 소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그녀들과 한 족속에 묶어 손쉽게 비판해버리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나는 몸부림을 쳐가며 ‘페미니스트’이기를 거부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같은 업무를 처리하면서 여성이 남성이 받는 급여의 평균 77% 밖에는 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에분개한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명절이면 당연히 시댁에 가야 하거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서 시댁에 먼저 갔다 오면 친정에도 갈 수 있다는 여전히 불평등한 한국 사회의 타협에 이를 간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섹스를 하면서 온몸이 치즈처럼 녹는 순간을 사랑하고, 섹스가 싫다는 여자들에게 그것은 싫어하기 불가능한 행위라는 주제 아래 여자도 섹스가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침 튀겨 말하길 좋아한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나는 내가 들 수 있는 물건들을  베트맨이라도 되는 냥 갖은 오버를 떨면서 들어주겠다는 남자들의 행동을 잘못 배운 우월감이라고 해석한다. 동시에 작은 상자라도 들어서 팔 근력을 키워야 할 여자들이 자기 신체의 힘을 없신 여기면서까지 약한 새 한 마리가 되길 자처할 때 그녀들을 경멸할 정도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서른을 다 먹어서까지 주민등록등본의 내 보호자가 아버지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용납하기가 힘들고, 결혼을 하면 내 보호자에 남편의 이름이 오를 거란 사실에는, 영영 나는 스스로의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치가 떨린다. 나는 사랑과 섹스를 같이 할 애인이 필요하지, 내 보호자가 될 남편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페미니스트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보기로 한다. 내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세입자를 한 명 들여도 되겠냐는 부탁을 하자 내 엉덩이를 감싸 안던 건물 매니저한테 끽 소리도 못한 채 겁에 질린 사지를 부들부들 떨기만 했던 페미니스트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빳빳하게 선 바지 앞 춤을 내 신체에 계속 갖다 대던 남자 동기 옆에서 이건 분명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그의 얄팍한 성희롱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페미니스트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왠지 멋진 여자는 겨드랑이 털쯤이야 무럭무럭 자라게 놔둘 거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본인은 매일 같이 겨드랑이 제모를 안 할 수 없는 페미니스트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예쁜 여자를 보고 좋아하는 남자들은 너무 단순 무식하다고 욕하면서 정기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페미니스트다.


 이걸 읽을 내 애인은 내 옆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봐봐라 네 고백만 들어봐도 페미니즘이란 게 얼마나 불완전한 건지 알 수 있지 않나. 하여간 페미니스트들이 문제야. 요즘은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이 활개라더군.’  

 록산 게이가 내 친구였다면 이렇게 응수해줬을 것이다. ‘ 그게 아니지, 페미니즘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말할 게 아니라 페미니즘 이름 아래 행동하고 있는 인간들 자체의 결함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본다면 네 여자친구가 겪는 모순은 있을 수 있는 거야. 페미니스트가 문제가 아니라 너처럼 페미니스트를 문제로 보려는 시선이 문제야 이 멍텅구리야.’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Bad’ 가 가지는 의미는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단점이 많고 모순 덩어리인, 정도로 해석되어도 좋다. 결함이 많은 인간이라서 결함이 많을 페미니스트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록산 게이는그녀의 방식대로 그녀가 믿는 것을 지지하기로 한다. 

 록산의 지지에 따르면, 나는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해서 편하고 살고 싶다는 여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 여자가 가져야 할 권리를 위해서는 같이 싸워줘야 한다.  팔 다리 제모는 관심이 없으면서 겨드랑이와 성기 제모에는 열을 올리는 내 개인적인 취향을 존중해도 된다. 나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남자들이 내게 신체적 위험을 가할 가능성이 크고 그 위험에 내가 속수무책이 될 거라는 두려움도 열등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록산은 나아가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페미니스트가 되어보는 것을 제안한다. 내게 이 제안은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페미니스트라는 군도 아래에 모여 21세기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새로운 명령에 다시 굴복하고 마는 여성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진 힘과 약점을 알면서도 여성이 다른 모든 성들과 동등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만큼은 주저하지 않고 각양각색의 목소리로 함께 떠들 때에 찾아지는 페미니즘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내가 나쁜 페미니스트 서문을 읽으면서 기분 나쁘게 깨달은 것은 정말로 애매한 여자는 나였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라는 지목에는 한사코 부정하면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해야 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해왔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다는 친구에게, 그게 뭐 공부할 거냐고 여자라면 자연히 알게 되는 상식이지 않냐고 타박을 줬다. 애매할 뿐만 아니라 무식하기까지 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다음 책으로 읽을 예정이다. 그녀의 문장을 빌려와서 말하자면, 나는 여자라면 모두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나서야 어떤 여성들과 나를 구별 짓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설사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처구니 없는 비난과 차별, 심지어 폭행을 당하고 있다면, 기꺼이 그들의 목소리를 거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건식을 하는 아시아계 이민자 여성이다. 내가 비건이 아니었다면 아시아인이 아니었다면 이민자가 아니었다면 여성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차별을 받아 왔다.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 내가 차별이라고 느꼈던 대부분의 상황은 농담 같았고 나는 비웃음만 조금 사면 됐으니까. 내가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별은 곧 종료됐다. 나는 그것에 만족했다.

세상에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들에게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은 괴짜 취급을 곧잘 받는다. 그들은 고기 먹는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고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고립시키고 싶다. 인종 차별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을 받은 백인들은 함부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섣부름을 행하지는 않으나, 그들 깊은 곳에는 백인이 깜뚱이나 원숭이보다는 훨씬 낫다는 믿음을 단단히 가지고 있다. 내가 만난 백인들은 대부분 그랬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이민자로 살게 된다는 것은 내 언어와 문화를 잃고 새 언어와 문화 속에서 유치원생보다 조금 더 멍청한 사람이 되어보는 일이다. 멍청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금 되받는 일이다.


그들의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슬픔과 분노가 일어나는지 알기 힘들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어서 그들이 겪는 고통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고, 그들의 고통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기를 먹으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 인종 차별 주의자들, 국수주의자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겪어보지 않아서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 라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말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나는 결국 그 사람들이 너무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너를 이해하려고 네 입장에서 생각해보는데 너는 콧방귀도 뀌질 않는 것이다. 너도 이제 내 입장이 어떨지 한 번이라도 상상해봐야 하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네가 될 수 없고 너도 영원히 내가 될 수 없지만 우리는 각자가 서로가 되는 상상 정도는 연습할 수 있는데. 너는 그마저도 나를 위한 사치라고 생각하는 금속 같다.


앞으로도 나는 내 식탁 앞에서 비건일 것이고 캐나다에 사는 아시아계 이민자로서 살아갈 것이고 세계에 존재하는 성 중에서 여성으로 살아갈 것이다. 많은 금속 같은 인간들을 마주할 것이다. 어쩌면 다른 무엇에게 내가 먼저 금속이 되는 일을 행할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잖아. 속되고 경박하고 모순적인 나라는 인간이 이 카오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나쁜’  무엇인 채로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되찾고 그것을 발화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일에 게을러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나쁜’ 채로 내 권리를 떠들 때 나쁘지도 못해서 울고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보려고 조금이라도 부디 눈길이라도 부디 애써보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그래서 자꾸만 반성하게끔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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