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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책<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고

이 독서일기를 끝마칠 때까지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친구들에게 독서일기를 함께 써보자는 제안을 건네면서 나는 거듭 강조했다. 마감을 꼭 지켜야 한다고. 이걸 우습게 알면 안될 거라고. 나는 진지하다고. 엉덩이를 떼지 않겠다는 진지한 마음은 ‘이슬아’ 때문인데, 지금부터 나는 무턱대고 그녀를 질투하고, 동시에 우러러 볼 작정이다. 


그녀는 나와 같은 1992년생이다. 우리 엄마도 복희와 같이 67년생에 구제 옷 장사를 한다. 우리 엄마도 ‘여기가(가슴이) 뜨거워서’ 누워있는 대신 아침 마다 과일 가게 샷시를 걷어 올렸다. 나도 엄마를 주심이라고 부른다. 나도 집에서 발가벗고 있기를 잘하고, ‘7번 방의 선물’을 최고의 영화라고 추켜세운 남자랑 발가벗고 잠을 잔 적 있다. 나도 그녀처럼 다음 생에서는 댄서가 되기를 동경하고,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에 운 적이 있다. 그녀가 말하는 ‘비건 지향 생활’이 그녀가 비건이라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향한다는 건 확실하니까 또 하나의 공통점을 추가한다. 무엇보다 나도 그녀처럼 글을 잘 쓰고 싶다.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계속해서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김연수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다 쓰는 수필은 좋은 글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매일 같이 써내야 하는 수필이 항상 좋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슬아는 매일같이 수필을 썼고, 한 편당 500원에 파는 값싸고 부담스러운 일까지 해냈다. 내게는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없었기 때문일까. 나는 언젠가 일기에 이런 말을 썼다. ‘매일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눈과 마음이 중요하다.’ 개뿔도 해보지 않아서 한 말이리라. 글쓰기는 낭만적인 다짐에 있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써내려 가는 것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이슬아의 글들은 증명해준다. 그녀는 자신을 글을 쓰는 노동자라고 칭한다. 햄버거 포장을 싸는 노동자의 묵묵한 성실함 같은 것으로 쓰인 그녀의 글들을 읽다보면 ‘노동자’란 호칭이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가 포착한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글을 쓴다고 했다. 나는 그녀 노동의 글들이 알록달록하다고 생각했다.  이슬아는 어쩌다가 알록달록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리도 많이 목격할 수 있나. 어디서 뭘 먹고 뭘 하고 살길래.  어쩌면 이슬아는 운이 좋아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다른 이들보다 좀 많을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말고 싶은데, 책을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은 이렇다. ‘이슬아가 삶에 불어넣는 숨이 아름다움을 자꾸만 만드는 거구나.’ 그럼 그녀의 글들은 그녀의 숨에 얼마쯤 빚진 건데, 그 숨은 무엇에 빚졌을지 따져보는 것이 오늘 내 독서 일기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웅이에 관한 것이였다. 산업 잠수부로 일했던 웅이가 물 속 깊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패닉을 극복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 그는 패닉이 올 때면 수면으로 달려 오르고 싶은 욕구를 참고, 가장 가까이 보이는 기둥으로 헤엄쳐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꼭 끌어안고 다음 달에 받을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울어야 했다. ‘뭐야. 나도 너무 무섭고 외로울 때 애인을 끌어안고서 우리가 벌어온 돈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를 곳들을 상상해야 하는데.’, ‘ 웅이는 어떤 사람일까? 어쩌면 웅이는 문학을 읽는 사람이였을까? 패닉 극복법이 너무 문학적이잖아.’, ‘문학을 읽지 않았더라도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은 아닐 테지. 그래서 이슬아는 지루하지 않는 글을 쓸 수 있게 된 걸까.’같은 여러 생각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복희다. 딸에게 소중한 정보일 거라며 남자 성기 크기  간별법을 알려주거나, 무성한 자연 속에서 그녀가 경험했던 ‘내가 없는데 아주 충만한 느낌’의 흩어지는 자아에 대한 고백, 쿠킹 클래스에서 면접을 보는데 뜬금없는 자기 소개 요청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 복희야!하고 스스로 탄성을 내지르고 마는, 딸이 누드 모델을 시작하자 선물로 예쁜 가운을 선물하는, 딸을 임신하던 날의 웅이와의 선명한 섹스에 대해서 설명하는, 많고 많은 복희 엄마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이슬아를 부러워했다. 그녀가 그것들을 너무 맛깔 나게 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 이야기 속의 그녀 부모들은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가 알록달록한 동시에 담백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의 많은 지분이 그녀의 부모로부터 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글에 드러난 웅이와 복희, 조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가족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거라고 경험하게 된다.


또 그 숨의 얼마쯤은 그녀 주변 사람들에게 빚졌을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와 그녀의 글쓰기에 대해서 내보이는 반응은 그녀의 글만큼이나 다채롭다.  한 친구는 이슬아를 시시때때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불안한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토닥이는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러니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 친구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이슬아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얼마나 내어 읽히게 하는 사람인지를 짐작했다.

이슬아는 일간 연재를 하던 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친구들의 글을 자기 글 대신 연재하기로 한다. 자기 글만 읽히기에는 친구들이 쓰는 좋은 글이 너무 아까워서라고 했다. 나는 이슬아가 그녀의 친구들에게 어떤 마음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인지도 짐작했다. 특히 ‘양’에게 헬스 PT를 공짜로 양도했다는 얘길 들었을 땐 보살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숨은 아침에 눈을 떠서, 이불을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체조를 하고, 고양이 밥을 먹이고, 식물들 물을 먹이고, 글쓰기 수업을 하고, 글을 쓰고, 달리는, 그녀의 끈질긴 실행력이 없었더라면, ‘일간 이슬아 수필집’같은 것으로 실현 불가능했을 숨이다. 그녀의 끈질긴 노동은 숨이 숨으로 그치는 만연한 일을 지나쳐서 숨이 가질 수 있는 물질성을 기어코 갖게 했다.


이슬아 수필을 읽는 것은 글도 그림도 노래도 잘하는 그녀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으며 같은 세월을 조금 더 지루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다.


엊그제 밤이었다. 한동안 ‘이슬아’에게 빠져 살던 나였고, 왠 일인지 애인이 거실에서 전등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흔치 않은 모습인데. 나도 그 옆에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마저 읽기 위해 앉았다. 나는 그 전부터 그녀와 내가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왔다. 그렇게 말하면 나도 그녀처럼 글을 많이 쓸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핸드폰 스크린을 듬성듬성 넘기면서 읽다가 한 순간 멈춰야 했다. ‘67년생 복희는 구제 옷 장사를’ 한다는 문장에서였다. 그 순간 나는 내 안에서 삐져 나오고 있는 말을 눌러 담을 수 없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목소리로 애인에게 말했다. ‘오빠 이슬아 엄마도 67년생인데, 우리 엄마도 67년생이고, 이슬아 엄마도 구제 옷 가게를 한다는데, 우리 엄마도 구제 옷가게를 하거든.’ 구제..에서 내 목소리가 살짝 떨렸을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야? 너희 엄마 가정주부 아니셨어?’ 애인에게 쓸데없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지금 말해 소용없는 비밀을 말해버렸다.


아빠는 내게 상스러운 기억들을 많이 심어줬다. 그 옆에 서서 희생양을 자처했던 엄마도 그  상스러움에 가담해야 했다. 얼마나 상스러웠는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검열을 거쳐 말해야 하는 건지 분별하기 어렵다. 어쨌든 그것들은 너무나 상스러워서 나는 누가 나를 조금이라도 째려볼 때 그것은 그가 내 상스러움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내가 보고 들어야 했던 누추함을 훔쳐볼 수 있을 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그가 나마저 상스러운 것으로 지목해버릴 것이 두려웠다. 나는 상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드러내야 했다. 가장 상징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소풍 때마다 내가 입었던, 지금 생각하면 으악스럽기 짝이 없는 내 의상들이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무려 진주 왕관을 쓰고 소풍에 갔다. 몇몇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나를 뜨악스럽게 쳐다봤다. 한 선생님이 내게 와서 말했다. ‘가영이는 자신감이 넘치구나.’  그 왕관을 쓰게 된 경위가 자신감과는 무관하게 상스러움이 갉아먹고 남은 내 가슴이 부끄러워서 몸부림친 장식이었다는 것을 그 눈치 빠른 선생은 알고 했던 말일까.           


이슬아와 나의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여기에 있지 않나.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서 이슬아는 자기 삶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가질 수 없어서 좆같다고 말하고, 갖고 싶은 것에 대해서 존나게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이 태생적으로 잘 되는 것인지, 노력해서 가능하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나는,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왜 빵구 난 양말에 어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포장지를 덫대고 싶었을까. 나이를 서른 가까이 먹고 서까지 부모를 탓하는 못난 짓은 하고 싶지 않은데, 아무래도 이건 내 가정환경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결론 짓지 않으면, 앞으로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기가 조금 버겨울 것라는 핑계로 부모를 욕하는 사람이다 나는. 욕을 마치고 조금 더 내가 되어야겠다, 는 말을 애인에게 말했다. 애인은 ‘그래서 너는 엄마 구제 옷가게에서 구제 옷을 사입었어?’라고 물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니? 나는 그에게 내가 왜 그런 하찮은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지, 지금껏 그것을 얼렁뚱땅 넘어가기로 마음 먹었던 그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다시 한 번 더 나의 허영을 보호하고 싶었다.


이슬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건강하고 부지런해야지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너를 보고 명심한다. 네가 너무 충만한 그 지점에서 내가 너무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서, 그걸 확인한 내 마음이 삐뚤어진 질투심으로 끝나버리기엔 너무 용감한 글들을 성실하고 두껍게 써줘서 고맙다.  나는 아무래도 조금 더 내가 되는 일 이전에 거짓말을 그만하는 인간이나 되어야 겠다.

다행히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자기 반성 가득해서 휼륭하고 전형적인 독서 일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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