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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08. 2020

[일기]전염병을 겪으며.

1.비둘기 오다.

한 마리 비둘기가 발코니 유리문을 향해 날아왔다. 툭,하고 부딪혔다가 떨어진다. 나는 잔뜩 겁을 먹고서 가까이 다가가 본다. 반대편 유리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비둘기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왼쪽 다리와 발바닥을 잔뜩 오므리고 있다. 얼마 가지 않아 긴장이 풀렸는지 비둘기는 절뚝거리며 발코니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절뚝절뚝.

발코니 한구석에는 내가 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나무 판자로 된 신발장 하나가 있다. 비둘기는 그 아래 자리를 잡고 폭삭 주저앉았다.

내 생애 처음 맞는 일이다. 다리 다친 비둘기가 내가 사는 집 발코니에 떨어진 것은. 영학이는 이게 무슨 의미일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대신 나는 비둘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집 거실을 배회하고 있다. ‘어떡하면 좋을까. 뭘 해줘야 할까. 먹을 걸 먼저 줄까. 죽진 않겠지? 바깥 기온이 몇 도지? 춥진 않으려나?’

 구글에 검색해볼 정신은 뒤늦게 들었다.   ‘injured pigeon who to call.’

 내가 사는 지역의 동물 재활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친절한 상담원 언니는 비둘기가 설 수 있을 높이의 박스를 구해 폭신한 수건을 깔고, 반드시 장갑을 낀 손으로 비둘기를 그 박스에 옮겨 담아 자신들의 센터로 데려오는 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최선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박스에 폭신한 수건을 깔고 장갑을 끼고 발코니 창문을 열었다. 비둘기는 조금 놀랬다. 나는 용감하자고 마음 먹고 두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친밀감을 조성하기 위해 말도 걸었다. ‘넌 이제 치료를 받을 거야. 겁먹지 말고 가만히 있어.’  비둘기 씨는 퍼드득 퍼드득, 거친 날갯짓을 연거푸 했다. 나는 용기를 내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셔야 했다.  


 내가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려는 순간 그는 거친 날갯짓을 성공시켰다. 난간에 번쩍 올라섰다. 나도 놀랐지만 예상 외의 성공에 본인이 더 놀란 것 같았다. 그의 호흡이 무척 가빠 보였다. 나는 뭘 어찌하면 좋을까 같은 눈을 뜨고서 장갑 낀 두 손을 허공에 펼쳐 놓고 그를 바라봤다.


 난간에 선 비둘기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비극은 두 가지였다. 비둘기가 스스로 떨어져 자살하거나, 그를 잡으려던 내가 그를 떨어트려 죽이거나.

 내가 끔찍한 상상으로 거의 울음 직전에 있을 때, 비둘기는 행동했다. 보란 듯이 푸드덕푸드덕 소리를 내며 도움 닫기를 하더니 놀라울 정도로 재빠르게 날아가버리는 것이었다.  


비둘기와 함께 찾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비둘기가 날아가버렸어요.’ 

‘어머, 다행이네요!’ 

나는 비둘기를 잡지 못한 것이 다행인지 잘 모르겠다.


2.전염병이 오다

 전염병은 비둘기처럼 툭,하고 찾아오진 않았다. 아마 떠나는 것도 비둘기와 같진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전염병의 시간에 살게 되었다.

 한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릴 때만 해도 매일 아침 뉴스를 보며 감염자 및 사망자 수를 확인했다. 그 때만 해도 숫자들은 내 상상의 범위 안에 있었다.

 캐나다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팬데믹이 선포 되었다. 몇몇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언젠가부터 감염자와 사망자의 숫자가 너무 거대해져 버려서 뉴스를 봐도 공감하기가 어려워졌다.

 뉴스 대신 창 밖의 거리를 내다보며 지내고 있다. 거리엔 사람이 없다. 너무 많아도 공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공감은 사라진다. 마트에 가서 통조림 코너에 남은 것이 없고 휴지를 살 수 없을 때가 되어야지 전염병의 실체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뉴스를 보지 않고, 일을 나가지 않고, 만나는 사람 없이 집 안에만 머무는 일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다. 나는 이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걱정보다는 무력감 같은 것을 자주 느낀다. 내가 느끼는 무력감이란 세상과 무관한 채 하루하루 쌓아져 가는 내 일상의 정돈에서 온다(그렇다. 나는 하루가 쌓을 수 있는 무엇이라고 믿어 버린다.)


 전염병이 가져온 내 일상의 변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일을 하지 않는 덕택에 24시간이 나를 위한 시간들이다. 맘잡고 하고 싶었던 영어 공부를 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유튜브도 한다. 내 일상은 이제 남을 위하지 않는다. 이 시간들을 언제 다시 빼앗길지 몰라 조급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하면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뜨고 뜨겁게 우러난 커피를 들고 서둘러 책상 위에 앉는 순간. 오늘 하루도 잘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책을 펼쳐 드는 순간. 내가 그런 순간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많은 아침들을 이른 출근에 양보하며 빼앗겼던 경험 때문이겠지.

 그렇게 시작된 아침 이후로 시간은 좀 더 알차거나 성글게 흐른다. 운동이 잘 되는 날도 있고 책이 유독 잘 읽히는 날도 있다. 뭐든 잘 안 되는 날도 있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단지 나는 벽돌을 쌓아 올리는 기분에 취해 있다. 빼앗기는 대신 쌓는 것을 너무 하고 싶은 사람에게 자가 격리만큼 유용한 게 있을까 싶다. 남자친구가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일주일에 100불’이라는 소비 제한선을 둘 때에도 나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만다. 다시 책상 속 내 세상으로 안착할 수만 있다면 돈이 무슨 대수랴, 부족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언제까지고 이 생활을 이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뚜렷해진 일상 속에서 이제 내 자신의 삶만 쌓아가면 되니까. 그렇게 믿어버리면 되니까. 나는 전염병과 함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나와는 무관할 일들이라고 생각해버린 듯하다. 노동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고려한다고 해도 내가 가지는 일상의 평안은 비정상적인 데가 있다.


 전염병의 실체에 대해서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은 전염병이 가져온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지켜내고자 한다. 가까운 나라에서 몇 십만 명이 감염됐다는 소식에는 입을 살짝 벌리고 잠시 놀라고 말지만, 항상 찾는 카페가 문을 닫아서 사고 싶었던 원두를 살 수 없다는 것에 더 큰 위협을 느끼는 식이다. 전염병이 앗아가 버린 누군가의 상실에 대해서 공감하기에는 너무 단단한 개인적인 목록들이 개인의 생각을 잠식해 버렸다.

 나는 정말 이 전염병 앞에서 끝까지 개인적일 수 있을까. 아무리 상상 불가능한 숫자들이 죽어간다고 해도, 동요 없이 내가 쌓고 있는 벽돌들을 차근차근 올려가는 일을 계속해나가도 되는 걸까.

 한 개인의 삶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도 계속 된다. 그것은 당연하고, 당연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울 때, 한 개인이 그저 자신의 삶만을 악착 같이 살아낸다는 게 자연스러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기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이미 어긴 전례가 있는 나로서는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떠드는 것만큼 염치 없는 짓은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다.

 단지 나는 고백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 개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이 와중에 나는 내 생각과 감정마저 아주 개인적으로 축소되는 것을 목격한다. 나는 내가 이렇게도 좁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낀다.      


 다친 비둘기가 우리 집 발코니에 떨어진 것에 대한 의미를 찾지 말아야 한다. 비둘기는 어쩌다 우리 집에 온 것 뿐이다. 내가 찜찜한 것은 그 상황에서 좀 더 잘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좀 더 잘 대처했다면, 비둘기는 병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겁을 좀 덜 먹고 그를 꼭 부여잡았다면, 비둘기는 다친 다리를 치료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무서운 것이 많고, 두려움에 판단력과 기지를 잃을 때가 매번 생기고 만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 어떤 사람들은 지구 종말론을 끄집어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말한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끝날 거라는 절망과, 때가 되면 하느님이 구해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 모두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는 걸림돌이기만 할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저지하는 일입니다.’

 카뮈의 <페스트> 속 의사 ‘리유’의 말처럼 지금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저지하는 일이다. 이 상황에서 그것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예견과 속단도 필요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눈 앞에 있다면 그 일을 할 뿐이다. 희망이 필요하면 희망을 쓸 수는 있겠지만 희망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마땅히 해야 하는 일과 다행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일을 나와 상관 없는 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전염병의 감염자들과 사망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비극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비극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일이다.


 전염병의 실체가 그 병의 숙주가 되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잊어왔던 공감을 불러내야 한다. 전염병은 내가 쌓은 벽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염병에 대한 책임감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눠지며 그것이 끝날 때까지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어쩌면 전염병도 주춤하지 않을까. 그렇게 견뎌내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까.


 과연 겁 많고 이기적인 한 인간은 자신이 내뱉은 생각에 대해서 작은 책임이나마 지려고 할까. 두려움에 판단력과 기지를 잃는 어리석음을 만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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