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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12. 2020

[책] <페스트>를 읽고

7시는 박수치는 시간

1. 사람, 카뮈

카뮈는 1차 세계 대전 발발 1년 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막 1살이 되어갈 때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전사했다. 그는 청각 장애를 가진 어머니 아래에서 아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마르크스를 통해 자유를 배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겪으면서 자유를 배웠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와중에 ‘이방인’을 썼고  ‘페스트’의 구상 또한 전쟁 중에 시작했다. ‘페스트’의 전염병이란 그가 겪은 ‘전쟁’을 상징하기도 한다.


가난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 끔찍했을 1,2차 세계 대전을 차례로 겪었던 카뮈가 ‘부조리(absurd)’를 인식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할까. 

그가 살았던 세상의 장면들이 얼마나 부조리했을지, 그것이 그의 몸 속에서 어떤 종류의 생각을 일으켰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설사 상상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끝내 그 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모를 테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오랜 가난과 전쟁의 세월을 앞에 두고 ‘반항’하는 글들을 썼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전쟁이 계속될 때 그가 부여잡을 수 있는 건 뭘까. 신일까. 도덕일까. 영웅일까. 카뮈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대신,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물들을 그렸다. 나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실제 그의 삶 속 그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2. 소설 ‘페스트’

 오랑이라는 도시는(알제리에 실제하는 도시, 카뮈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페스트가 불어 닥치면서 봉쇄된다. 페스트를 알지 못할 때에 아직 사람들은 개인적일 수 있었다. 페스트가 고개를 쳐들면서 도시는 감옥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고 누울 곳 없는 시체들은 커다란 구덩이에 뭉텅이로 묻힐 뿐이다.

 그들에게 개인의 삶이란 게 있었을 때 상상해보지 못했던 암흑이 그들을 이끈다. 이후로 페스트는 오래도록 도시에서 사람들의 희망을 빼앗는다. 그들은 희망을 무서워하는 지경에 이른다. 페스트는 끈질기다. 잠시 고개를 숙인 듯하다가도 금세 맹공격을 재개하는 식이다. 언제까지 어둠은 계속될까. 그들이 믿는 정상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희망을 죽이지 않아도 될까.

 

 소설 ‘페스트’에는 6명의 주요 인물들이 나온다. 전염병 아래에서의 그들 각자는 상징적이다.‘사랑(개인의 행복)’을 구하는 랑베르, 끝까지 ‘하느님’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파늘루 신부, 신 없이도 ‘성인’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답을 찾는 타루,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선량’하고 연약하기 그지 없는 그랑, 가장 ‘이기적이고 악한’ 코타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성실함’을 믿고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 ‘리유’.

 카뮈가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인물은 의사 ‘리유’다.

 

 ‘리유’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다. 그가 믿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실성,같은 것이다.

높은 자리의 관리자들이 페스트를 페스트라고 선언하는 문제로 주저하며 그것의 이름을 짓는 문제로 목소리를 높일 때, 리유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을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임을 상기시킨다. 페스트를 두고 하느님이 마땅히 내린 벌이라고, 인간은 하느님의 벌로부터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파늘루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는‘병고의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우선 치료부터 해야 한다'고 대답하는 인물이다.

‘리유’는 이 집 저 집을 돌며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가려내고, 그들의 몸에 생긴 종기들을 짜낸다. 밤을 새워가며 환자 돌보기에 애쓴다. 그는 관념에도 영웅주의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해야할 일을 한다.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에게는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모든 일이 소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등장 인물이 인간적이지 않을 때는, 보통 그가 너무 도덕적이거나 영웅적이거나 불사조인 것이 이유였다. 그와 달리 ‘페스트’에서 ‘리유’가 인간적이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전염병(삶)에 저항하는 그의 태도가 패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성실하기 때문이다. 패배주의적이면서 성실한 인간을 본 적 있는가.


 리유는  세계의 부조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신이나 영웅심은 필요 없다. 리유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은 ‘패배자’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 자신인 ‘인간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패배자가 되는 방식으로 낮고 끈질기게 세상에 반항한다.


‘리유’가 말하는 ‘인간이 되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내가 그의 반항이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한 것은 ‘반항’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다. ‘리유’는 부조리를 인식한 이후, 그저 실용적이고 건조한 인간이 되는 대신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져버리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인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 많음을 인식하고, 다른 이들의 태도나 결정을 존중한다. 설사 동의하지 않을 때조차 그가 상대에게 보이는 태도는 예의 바르고 만다. 그가 반항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일 뿐이고, 삶에서 그는 따뜻함 가득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인간이 되는 일’이란 결국 패배자인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치지 않는 일 아닐까.


‘리유’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오랑을(전염병을) 벗어나고자 하는 랑베르를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행복을 바란다. 왜 자신을 말리지 않냐고 묻는 랑베르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마 나 역시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고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맹목적이고 극단적으로 하느님의 세계로 숨어버리는 ‘파늘루’ 신부를 대할 때 조차 리유는 그와 자신의 접점을 찾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우리는 신성모독이나 기도를 초월해서, 우리를 한데 묶어 주는 그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삶을 살아온 ‘타루’가 양심을 가진 ‘성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리유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다. 결국 어느 지점에서 생각이 다르지만 그는 ‘타루’와의 우정을 귀하게 여길 줄 안다.

 보잘 것 없는 시청 서기인 ‘그랑’의 존재와 그의 선량한 마음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도 ‘리유’고, 마지막까지 황당한 이기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코타르’라는 죄인에 대해서도 리유는 괴롭게 생각할지언정 그를 벌하자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등장 인물 중 몇몇은 살고 몇몇은 죽는다.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를 생각해다가 카뮈가 하고 싶었던 말이 과연 이런 것일까 생각해본다. 


 달콤한 위로 없이 삶을 직시하는 사람은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 삶에는 거품처럼 부풀 웃음과 거짓말, 그로 인한 안식이 필요하다. 삶을 똑바로 쳐다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야 한다. 무너진 채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똑바로 보는 일을 태초부터 외면한다.  삶은 부조리한 대신에 천국으로 가는 열쇠가 될 수도 있고, 소풍이 될 수도 있고(천상병 시인의 ‘귀천’), 하나의 업적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영웅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이 부조리한 사람들은 삶을 살고, 삶이 희망 찬 사람들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 내가 살고 있는 ‘페스트’

  ‘페스트’를 읽고 카뮈가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페스트’를 읽고 ‘이방인’도 다시 읽어봤다. 다시 만난 ‘뫼르소’마저 자신의 이웃들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

 그가 그린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저항하는 인물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인물이다. 까뮈는 애정을 가진 인간들의 연대 의식이 ‘페스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말한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페스트’는 더 이상이 소설이 아니게 되었다.

트뤼도 총리는 백신이 계발되기 전까지 지금과 같은 격리 생활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할 것이며, 백신이 계발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이 걸릴 거라는 공식 발표를 냈다. 미국에서는 시체를 묻을 땅굴을 파는데 속도를 높이고 있고, 싱가포르에서는 다시 감염자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모두 오늘 아침 뉴스였다. 며칠 뒤에 어떤 뉴스가 어떤 식으로 내 가슴을 철렁하게 할지 모른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백신’일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백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과학적이고 완벽한 백신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 사이의 전염병의 시간들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향해야 할까. 무엇이 그것과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을까.

 

 < 6시 55분에 코트를 챙겨 입는다. 7시가 되면 어디선가 시작된 박수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챙겨 입은 코트를 훔치며 재빠르게 발코니로 향한다.(여긴 아직도 추운 눈이 내린다)  

맞은 편, 건너 편 아파트 발코니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작고 규칙적이게 들려오는 박수소리와 함께.

박수가 처음 시작된 날만 해도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나는 언젠가부터 ‘7시 박수치기 시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들도 한층 더 커져갔다. 어떤 사람들은 냄비와 막대기를 들고 나와 더 큰 소리를 만들어 주었다. 지나가는 차들은 동조의 경적을 울렸다. 소리들은 크고 우렁차게 퍼진 채 한동안 계속된다.  

나는 그 박수가 서로에게 보내는 메신저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텅 빈 거리와 사라진 사람들의 자취에 놀라지 말라는‘나 여기 있어요. 당신도 거기 있어요?’ 같은. 그것이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의료진들을 위한 박수였다는 것은 며칠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박수를 치면서 배달 업무를 하고 있을 사람들, 슈퍼 마켓의 캐셔들도 떠올린다.>

 

중국만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전염병은 한국을 찾아왔다. 트럼프가 미국은 감염자가 15명 뿐이라며 the great America를  외친 지 오래지 않아 현재 미국의 사망자는 1만 7천명을 넘어섰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찾아 들지 않은 나라가 없다. 나는 전염병 앞에서 각 나라 각 나라가 절대 독자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전염병은 각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다. 그러므로 백신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게 되는 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가 전염병에 맞서 지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공감과 연대로부터 올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인류에 공감하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억지겠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 편에 사는 내 이웃의 무사함을 바라는 일, 그것을 위하여 나부터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는 일은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내던져진 채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모르는 와중에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지금과 상황에서는 우리 각자가 최대한 사회적인 격리를 지켜내는 것이 전염병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방패일 거란 사실이다.


나를 지키는 것은 내 본능이고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되는 일’은 본능적이기만 하지 않다. ‘한 인간’은 한 인간 그 자체로 이뤄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다른 많은 인간들 속에서만 한 인간이 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살아남는 일은 다른 인간들이 함께 살아남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나를 포함한 전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전염병 앞에서 다른 무엇보다 운명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이 전염병의 시간 동안만이라도 말이다.

 오늘도 이웃들은 저녁 7시가 되어 발코니로 나와 손을 흔든다. 나는 그들과 좀 더 힘차게 박수를 치면서 하루를 마감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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