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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25. 2020

[책]<평균의 종말>을 읽고

토드 로즈 저


 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영재 반에 들기 위해 과외를 받았고, 중 3때는 외고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고, 고 3 때는 이대에 수시를 냈다가 떨어졌다. '손다이크'씨( 책 속에 소개되는 ’평균의 시대’를 만든 위대한 학자들 중 한 명)의 시각으로 봤을 때, 나는 ‘평균치’를 웃돌지만 그것을 크게 뛰어넘는 ‘우등생’은 아닌 것으로 분류될 수 있겠다.

 매번 떨어졌지만,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는 공부를 잘 하면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체화 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좋은 대학에 가야지 자기들처럼 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고, 선생님은 학생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좋은 성적임을 매번 상기시켰다. 왜 내게 다른 길의 가능성을 전혀 열어주지 않았냐고 그들을 탓할 수가 없다. 엄마 아빠는 내 교육을 위해서 이미 너무 많은 돈을 썼고, 설사 참신한 말을 하고 싶었던 선생들이 있었다 해도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표준을 벗어난 생각을 발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균의 시대에서는 개개인이 어떤 사람인가는 크게 중요할 수 없다. ‘평균값’에 비춰 개인을 수치화시키고 등급화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옳은 일이 된다. 무엇보다 그들도 ‘평균의 시대’에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을 다니는 동안 종소리가 치면 50분 수업이 시작되고 다시 종소리가 치면 10분을 쉬는 공장 식의 반복적인 수업 스케줄 속에서, 1번과 5번 사이의 가장 옳은 답을 골라내고 가장 옳은 답을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많이 맞춘 아이에게 1등이라는 이름표가 달리고 그 1등에게 가장 질 좋은 사회적 신분이 부여될 거라는 믿음 아래 기생하는 교육 시스템에서 교육 받아온 사람이, 그것을 벗어난 생각을 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 자신에 대한 질문들이 언제나 사회 시스템이 강요하는 성적이라는 평가 기준에 의해 잠식당하는 전체주의적 구조에서 자라난 개인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기회를강탈 당한 채 표준화된 근로자로 살아가길 종용 당한다. 거대한 시스템을 벗어나는 생각 따위는 실제 삶에서 무용해지고 만다.  


 나는 내가 가고 싶(다고 믿)은 대학에 가지 못했을 때, 내 인생이 얼마쯤 망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빠는 내게 큰 실망을 했다면서 내 앞에서 내 인생 걱정을 내 대신 늘어놓았다. 결국 나는 내 위시리스트에는 없었던 교대에 갔다. 교대에 가면 선생님이 되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는데,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내가 학교를 일찍 그만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수도 있겠다. 

 전형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 또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졸업을 하고, 직장에 취직하고, 누군가를 만나 적정한 시기에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년의 위기를 겪다가 또 지혜롭게 극복하고, 자라나는 자식들을 보면서 노년을 준비하는 삶. 전형성이 가지는 평안이 누군가에게 꿈일지도 모르고, 그 안에도 그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있을 테지만, 그것은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을 자퇴하고 집을 나온 이후로, 나는 사회가 제시하는 ‘평균에 다다르는 동시에 평균보다 뛰어나야 하는 게임’에서 이탈했다. 내가 내디딘 경로 이탈의 첫 발자국을 다행이라고 여긴다. 허영심 많고 권력에 순종적인 내가 그 게임에 계속해서 남아있었다면 지금쯤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첫 발자국 이후로 내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데에 썼다. 그러다 보면 원하는 게 차츰 드러날 거라는 식의 막연한 희망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나는 오래도록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죽는 건 똑같다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만큼의 힘만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해서 하지 않을 방법을 마련하다 보니까 시간이 다 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 되는 게 오히려 나았을까?)

 

 지금까지의 내 궤도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다는 식으로 나를 위로하는 게 낫다. 언제나 주춤거린 것치고는 삶이 영 괴팍해지지는 않았으니까. 이제 이 위로의 카드를 자주 꺼내 드는 대신, 내 마음에 쏙 드는 궤도를 그려나가는 일에 집중하고 싶은데, 이게 쉽지가 않다. (허무를 지나고 나면 의욕이 넘치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탐색하는 게 여전히 자연스럽지 않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이 뭔지를 잊지 않는 게 어려울 때가 많다. 

 (부인하고 싶지만) 나도 내 부모와 선생처럼 평균치에 길들여진 인간이다. 표준화된 교육 및 사회 환경에서 자라났다. 나의 장점과 단점들, 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환경에서 교육받지 못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 인간인지 알 수 있는 제대로 된 방법을 몰랐다. 앞날이 막막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사회가 요구하고 대접하는 류의 인간이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내 삶을 실험하고 경험하기에는 이제 내가 스무 살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바심도 들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따위는 너무 멀리 있는 질문 같아서 그냥 밥을 많이 먹고 싶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이 시간들 마저 흐트러질 때가 많아서 내 자신이 못 미더울 때가 생기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애쓴다. 나라는 개인의 작동 시스템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고, 그것을 알아가는 방법을 여러 번 시도해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시스템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잃지 않고, 그것의 최선의 버전을 만들어 가는 일을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로 굴러가는 인간이 되고 싶다. 

완고하게 내 궤도를 만드는 일에 매달리는 고집불통이 되는 것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 언젠가 나도 책 한 권을 내 시각으로 읽어내는 일, 내 생각을 내 표현으로 써내는 일에 능통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잘하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잘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면서 먹고 싶은 원두를 골라 먹을 수 있을 만큼 무겁지 않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마음에 ‘쏙’ 드는 궤도는 내 상상이겠고, 마음에서 끊이지 않는 내 궤도를 이어서 만들고 싶을 뿐이다. 

 

세상에 평균을 벗어나는 이상한 궤도들이 참을 수 없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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