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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May 08. 2020

[영화]<줄리 앤 줄리아>를 보고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사촌 언니는 god에 열광했다. 언니 방은 god브로셔로 사방이 장식되어 있었다. 언니는 특히 손호영에 집착했는데, 나는 언니를 약올리고 싶을 때마다 브로셔의 손호영 얼굴에 펀치를 가했다. 그럼 언니는 미칠 듯이 팔짝 뛰었다. 나를 독기 오른 눈으로 꼬셔보고는 이내 붙잡아 엉덩이를 호되게 때렸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언니에게 그 때 내 엉덩이를 얼마나 찰지게 때렸는지에 대한 옛일을 소환하면, 내가 그랬다고? 하고 되묻는다. 언니의 세계에서 이제 god는 사라졌다. 언니는 이제 아이들과 산다.

 

 내 친구들은 동방신기에 열광했다. 노래방이 아니더라도 어딜가나 동방신기 노래를 따라불렀다. 가방은 물론 락커룸에도 동방신기 멤버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여름에는 동방신기가 그려진 부채를 가져다녔고, 겨울에는..뭐가 있었더라... 뭐라도 있었다고 확신한다. 동방신기는 그녀들에게 절대자였고, 오래도록 그녀들 곁을 지켰다. 


 사촌 언니가 god를 왜, 어떻게,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친구들이 동방신기에 열광했을 때도 시큰둥했다. 그건 내가 쓸데없이 강한 에고를 가져 다른 누구를 좋아할만한 심적 형편이 안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취향을 가지기에는 내면 세계에 너무 갇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울한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래와는 다르게 동방신기를 좋아하지 않을 만큼 성숙하다고 믿고 싶었던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두꺼운 벽공사 중이였다. 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누가 내 벽을 뚫고 들어오진 않을까 경계해야 했다. 내 잘못된 생존 방식으로 인해 나는 누구도 좋아할 줄 몰랐고, 당연히 불행한 아이였다. 

 팬심을 가진 아이가 언제나 행복한 아이는 아닐 테지만, 그 아이의 마음 한 칸은 적어도 그 대상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런 애정이 모든 버팀목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보다 마음이 건강할 가능성이 크고, 또 다른 누군가를 열심히 좋아할 가능성도 크다. 

   

  나는 스무 살을 먹고 나서야 누군가의 팬이 되는 경험을 했다. 내가 가장 오래도록 좋아해온 사람은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다. 나는 그의 찐팬임을 자처하고 내 남자친구는 그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고민이 생기면 빨간 책방을 틀어놓고 그의 말과 목소리를 들으면서 위로받는다. 그가 좋다고 말하는 책과 영화는 사수한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는 내 삶의 모토가 된 지 오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태도를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문장들을 사랑하고, 그 문장들을 읽어주는 그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왠지 내가 그를 몰랐다면 내 삶은 피폐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럼 내 남자친구는 옆에서 콧방귀를 뀌겠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는 일에 전혀 논리적이고 중립적이고 싶지 않다.    


 <줄리 앤 줄리아>를 봤다.

나는 영화를 보고 1) 삶이 맛있으려면 역시 줄리처럼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울 자세를 가지는 게 좋겠다, 그런 자세란 건 양파를 못 썰기 때문에 양파를 엄청나게 썰어보는 거야. 2) 365일 동안 473개의 요리를 해내겠다는 식의 결심은 언제나 건강한 것이고, 그런 챌린지를 잘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3) 줄리의 남편은 말했지. ‘지금 있는 곳이 집’이라고, 그래 어쩌면 집을 어디에 두냐보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에 대해서 훨씬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거야. 4) 저렇게 버터를 많이 쓰다니. 5) 저 초콜렛 케익은 대박일거야. 6) 줄리가 비건이였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7) 줄리아랑 남편은 둘 다 일하는 것 같은데, 왜 줄리아만 요리 하냐! 같은 생각을 했다. 


 잠자리에 드는데도 영화가 너무 좋았다는 감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줄리를 향한 줄리아의 팬심은 나를 들뜨게 했다.

 줄리아는 줄리의 요리를 따라하면서 불만스러운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되찾아 간다. 좋을 일이 있어도 줄리를 생각하고,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줄리라면 어땠을까’생각하면서 답을 찾는다.  줄리라는 등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방향을 찾아간다. 드디어 줄리아는 1년 챌린지를 완수해내고 줄리를 실제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에 설레지만, 만남이 성사되는 대신 줄리아는 줄리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해 받게 된다. 낙담한 줄리아에게 그녀의 남편은 이런 말한다. ‘네가 좋아한 건 네 상상 속에 있는 줄리였던 거야. 실제 줄리가 네 상상 속 줄리와 다른 것 뿐이야.’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시작은 분명 실재하는 사람의 실재하는 특성들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는 일이 계속되다 보면 그 사람은 이제 나의 누군가가 되고, 나는 내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들로 그에게 많은 옷을 환상과 더불어 입힌다. 그렇게 환상의 그대가 내 곁을 지켜주는 것이다. 

 나는 줄리아가 줄리의 옛집에 들러 줄리의 사진 앞에 버터를 선사하는 순간, 이제 줄리아는 ‘환상적인’ 줄리와 작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줄리아는 줄리를 좋아하겠지만, 이제 줄리아는 줄리아 자신의 요리를 만들고 좀 더 자신이 되려고 할 것이다.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위했을 때, 그 누군가를 떠날 수 있다(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처럼). 그렇게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위하는 일들을 겪으면서 한 개인은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이 되어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일이 있다면 세상에는 내가 너무 좋아해서 닮고 싶은 사람들이 한 때 이곳에 살다 갔거나 나와 같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길거리에서 얼굴을 마주치면 인상부터 쓰고, 무수한 이유를 들어 상대를 무시하려 들고, 비수가 될 말들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러나 세상에는 멋진 일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 멋진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등대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방향을 잡으니까. 내 마음에는 멋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빛들이 그 자리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는 덕택에 잠시 길을 잃는 일이 있어도 다시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따라하려고 애쓰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내가 엉망인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그들 덕분에 나에게 다시 해보자는 희망을 줄 수 있고, 세상이 엉망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그들 덕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완벽한 인간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깊숙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보잘 것 없는 발자국이라도 그것이 필요하다면 내딛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매료된다. 

 늙어서도 호기심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잃고 싶지 않은 목록을 덧붙일 수 있다면, 다음으로 '팬심'이라고 적겠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은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 


 <줄리 앤 줄리아>는 요리 영화라거나 성장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팬심에 관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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