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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06. 2020

탐하는 여자들을 위하여

욕망하는 여자를 읽고


    여자란 무엇인가?   

 엄마라는 여자는 아빠에게 밥을 해주고도 국이 짜다고 욕을 먹어야 했다. 욕하는 아빠가 술을 마시고 침대에 침입해 들어올 때면 엄마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를 위해 몸을 열어줘야 하는 시간에 살았다. 엄마의 엄마들은 오죽했을까. 여자들은 능동적인 동사를 잃으면 살아왔다.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기 전에 남자의 욕망을 읽어내야 했다. 그 틀에 맞춰 자신을 깍고 다듬으며 살아 왔다. 내 엄마와 할머니가 내 아빠와 할아버지를 위하여 다리를 벌렸을 때 그들은 즐거웠을까.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은 수녀 생활과 다름 없었다. 아빠는 내게 어느 남자도 가까이 접근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순결이라고 나를 양육했다. 어린 나는 순결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아빠가 내게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의 가능성은 그의 입김으로도 감각할 수 있었다. 나는 아빠라는 거대한 억압의 이불을 덮은 채 잠들고 깨어나고 다시 잠들어야 했다. 아빠의 담배 냄새와 술 냄새는 폭력의 냄새가 얼마나 친근하고 동시에 위협적일 수 있는지를 일상적으로 알려줬다. 나는 그가 무서워서 그의 말을 성실히 따라야 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중학생이였을 때 내 친구들은 아파트 계단에 숨어들어 키스를 하고 애무를 했다. 남자친구의 혀가 들어와서 깜짝 놀랬다가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빨아댔다는 얘기를 하던 친구는 얼마 가지 않아서 그 흥미진진한 탐색전에 대한 이야기를 멈췄다. 금욕 수행 중인 수녀 같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를 앞에 두고서 무슨 얘기를 해봤자 내가 이해할 수 없을 거란 걸 직감했겠지. 그 애 가슴은 흰 교복 셔츠를 빳빳하게 들어올릴 정도로 봉긋히 솟아있었다. 

 내가 좋다며 고백했던 남자 아이를 나도 너무 좋아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나는 아빠의 그림자에 지레 겁을 먹고 감히 그 애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일을 피했다. 날 생각하면서 자위를 한다는 그 애 말을 들었을 때 자위가 도대체 뭔지 몰라서 그 애의 표정을 살필 정도로 나는 성에 무지했다. 무지의 대가로 아주 큰 성인이 될 때까지, 그래서 엄마와 아빠가 사는 집을 뛰쳐나올 때까지 나는 남자를 전혀 몰랐다. 


 나는 아빠라는 세계를 떠나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엄마의 딸은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 싸우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 뜬다. 엄마가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자유다. 엄마가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므로 낯설고 어색한 자유다. 

 딸은 원하지 않아서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을 넘어선다. 이제 섹스는 딸이 즐겁기 위해서 남자들의 몸 위에 올라타는 일이다. 콘돔은 딸에게 임신하지 않을 자유를 줬고 일부다처를 욕망하는 남자들처럼 여자들에게도 일처다부가 가능한 일임을 상기시켜 준다. 딜도는 남자 없는 여자들이 혼자서도(혹은 여자친구와) 마음껏 즐거울 수 있는 놀이를 제공해줬다. 진화심리학이 여자들에게 성에 관한 협소한 논리의 감옥을 덫씌우려고 할 때, 콘돔과 딜도 같은 것 덕분에(여성용 비아그라를 포함하여) 억압에 속지 않을 자유를 보장해준다. 남성인 내가 다른 여자를 탐하는 것은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어쩔 수 없이' 타당한 일이지만, 내 집에 고이 갇혀 있어야할 내 와이프가 그녀의 성적 욕망을 발견하고 실현시키는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납득할 수 없는 고리타분한 남자들이 세상에 많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여성의 욕망이 이렇게 깊숙이 파묻혀 졌을리가 없다. 내 개인적으로 보나 <욕망하는 여자>에서 제시된 실험들을 보나 내 욕망은 내 남자친구의 욕망에 뒤쳐지지 않는다. 욕망을 금지당하는 일은 권력을 잃는 것과 같다. 딸에게 깊숙히 파묻혀 있을 욕망을 건져올리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의 욕망을 수면 위로 올리는 일이 더 이상 여자들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자란 남자의 필요를 뒷받쳐주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여자란 잡식성의 욕망 덩어리다. 



* 내가 원하는 것은 친밀감이 아니야.

 남자친구가 큰 가슴과 엉덩이를 씰룩이는 다른 여자들의 이미지에 발기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은 다시 돌아와줄 그의 시선과 친밀감이 아니다. 나는 단단한 갑빠와 터질듯한 허벅지를 가진 다른 남자들의 이미지를 원한다. 그가 발기하는 만큼 내 클리토리스도 다른 남자들을 조준하여 흥분해마지 않는다.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의 욕망이 ‘어쩔 수 없는 일'로써 사회 속에서 관용적으로 수용될 때, 나와 내 여자친구들의 욕망은 꽁꽁 숨어서 너무 숨어서 얼어버렸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은 친밀감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네가 원하는 것처럼 원초적이지 않다고 누가 너에게 장담해줬나. 네가 너의 원초적 본능을 옹호하고 내세우며 발기할 때 다른 한 편에서 내 클리토리스 또한 팽팽하게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길. 네가 나를 마녀라고 낙인찍어 내 욕망을 처형하고 싶다면 내게도 마땅히 네 음부를 처형할 권리가 있어야겠지. 

            

    여자의 오르가즘은 왜 나르시시즘적일까.   

 사진 속에 나체의 두 남녀가 있다. 남자는 여자를 뒤로 안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이 사진을 다르게 감상한다. 남자는 사진 속 나체의 여자를 보며 흥분한다. 그에 반해 여자는 사진 속 나체의 남자를 보지 않는다. 여자는 사진 속 남자의 얼굴과 그 시선이 향하는 사진 속 나체의 여자를 보며 흥분한다. 남자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여자는 남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사진 속 남자가 사진 속 여자를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한다. 여자의 오르가즘은 그를 바라보는 것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보는 것이 나라는 사실에 취한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현상일까 사회관습적인 현상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관습이 만들어온 경향성은 너무 깊어서 우리 무의식에 잠겨있다. 아무리 알을 깨고 또 깨도 벽은 언제나 앞에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내 앞의 알을 깨고 나서 그동안의 무지를 반복적으로 스쳐 깨닫는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면, 여자들에게는 깨부숴야 할 알이 훨씬 많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여자들에게 더 많은 억압이 있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미 누리는 자들에게는 부숴야할 알 따위를 인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한계는 그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인식하는 주체를 더 강하게 만든다. 깨닫는 일의 반복과 함께 내 원초적 본능을 일깨우는 일. 나는 그것을 먹고 강해지고 싶다.     



 내 여자 친구가 억울함을 토로한다. 여자들은 몸을 주면 마음도 주게 된다면서 '몸은 줘도 마음은 주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녀에게 몸을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다. 여자들에게 섹스는 왜 '주는' 일로 인식되어 버렸나.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은 여기서 내가 논하고 싶은 일이 아니니까 차치하자. 나는 '준다'라는 동사에 주목한다.

나는 주는 사람이 아니라 맛보는 사람이다. 그와의 섹스는 언제나 서로를 탐닉하는 일이다. 그가 나를 맛있게 먹을 때 나도 그를 맛있게 먹는 사람이다. 거기다 나는 그보다 좀 더 길게 먹을 수 있다. 그가 한 번의 사정으로 고요의 순간을 맞이할 때 나는 한 번 더 다른 맛을 꿈꿀 수도 있다. 여자로 사는 일은 (어느 것 못지 않게) 따먹을 수 있는 열매가 가득한 정원을 거느리는 일이란 것을 모르는 것은 그래서 내게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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