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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09. 2020

6월 8일 단상들

날씨가 좋았소

1. 독점할 순간

  같은 자리에 꼼짝 없이 네다섯 시간씩 앉아 하나의 무엇(예를 들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것)에 극도로 몰입하고 나면, 그것에 대한 몰이해와 그럼에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뇌의 저항, 냉담함과 감정의 과잉같은 피곤한 일들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음이 분명하지만, 정신이 개운해지는 마법의 순간에 빠진다. 내 몸 여기저기를 쑤시며 자리잡고 있던 통증들도 잠시 잃을 수 있다. 물론 마법은 되돌아온 일상에서 곧잘 자취를 감춰버리지만, 되돌아온 일상은 그 전의 그것과 다른 기운을 풍긴다. 빼앗기고 망연자실하는 시간들에 버티고 서있는 일상의 당연함 속에서 어느 한 순간, 포착해야만 하는 것을 포착했을 때 맛볼 수 있는 힘은 내게 색깔과 냄새를 부여한다. 고유성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고유한 자는, 흐릿한 세상에서 다른 무엇과도 비스무리하게 흐릿한 형태를 띄고 있을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순간 이후로 한동안은 내용을 가지게 된다. 자꾸만 내용을 갖고 싶다. 내용을 믿고 싶다.


2. 달리기

 달리기가 너무 싫다. 너무 싫다고 자꾸 말하고 나면 그것을 되뇌여 말할만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조금 위안을 얻는다. 너무 싫다고 몇 번씩 말하고 나면 내가 너무 심했다 싶어서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달리기와 좀 더 사이좋게 지내보려고 애쓸지도 모른다?ㅋㅋ 

 달리기가 왜 싫으냐고 물어보고 싶다면 묻기 전에 뛰어보길 보란다. 뛰어본 사람인데 도대체 왜 달리기를 싫어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당신을 존경해마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싶다. 심장이 조금씩 찢어지면서 그 사이로 피와 숨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것 같은 와중에(찢어지는 게 심장인지 폐인지 나는 모른다.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찢어지는 것만 같다는 것. 그렇다. 진짜 찢어져야할 건 내 엄살이다.), 다리는 내 마음과도 내 목적지와도 상관없이 반복적인 원의 동작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내 팔도 내 호흡도 앞으로 내달리는 다리에 복종하기로 했다. 나라는 것은 없어지고, 아니 내 육체는 분명한 형태를 띄고 바람에 맞부딪히며 뛰고 있는데,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내 육체는 볼품 없고 내 호흡은 거의 불쌍하게까지 들린다. 고상한 (척하는) 것들은 다 거짓말 같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신발도 다. 가장 꼴보기 싫은 거짓말은 내 자신이다. 


3. socializing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금방, 너무 쉽게 피곤해지고 만다. 내가 가진 자아도취 때문일까.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일까. 그런 게 아니라고 믿고 싶다. 

 너무 많은 말이 오가고 나면 주객전도가 일어나 버린다. 말을 위하여 말을 한다. 한 사람과 대화할 때도 가끔씩, 아니 보통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특히 여러 사람들이 모여 socializing이란 걸 하게 되면 언제나 그렇다. 말은 오해다. 말은 의사소통이 아닌 서로 오해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무얼하면 좋을까.

 나를 오해하지는 말길. 말이 일으킨 작은 염증들은 그야말로 작은 것들이다. 다행히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작은 애정을 갖고 있다. 


 내가 비건이라는 것을 밝히자 상대방은 나를 이런 식으로 공격한다. ' 식물이야말로 고통을 느껴요!' 동물의 고통에 대해서 떠드는 내 입이 정말 얄미웠나보다. 한 참 뒤에 또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세상에 무엇의 희생없이 이뤄지는 게 있나요?' 아.. 그가 나를 향해 한 번 해보자는 눈과 낭랑하게 차오른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을 때 나는 말의 무소용을 되뇌이며 입을 닫았다. 나도 그녀를 오해한걸까. 그와 싸우는 한이 있어도 내 생각을 되받아 말해야 했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도 사람이라는 것).'는 단정을 고수할 때 나는 어떤 오지랖도 부리지 않을 수 있다. 갈등도 소란도 목소리도 불편함도 크게 번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어쩌면 모든 껄끄러움이 귀찮고 성가시고 때때로 두렵기도 하기 떄문에 사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무엇의 희생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대한 집단을 위해 작고 약한 무엇이 희생당할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빠를 위해, 개인은 국가를 위해, 사육되는 동물들은 인간의 창자를 위해. 흑인은 백인을 위해. 노동자는 사장을 위해. 배우지 못한 것은 배운 것을 위해. 등등등. 인간은 머리색을 바꾸고 색다른 옷을 꾸며 입는 일은 정말 잘해내지만, 도무지 바꿀 수 없는 돌멩이들을 몸 속 깊은 곳 어딘가에 품고 사는 듯하다.  내 돌멩이들은 무죄라고 선언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 타인에게 야박한 나는, 그가 가진 어떤 돌멩이 하나를 철저한 무반응으로 소외시키고 싶다. 내 세상에서 가능한 멀리 밀어내버리고 싶다. 


 실재하는 인간 사회 속에서 나는 아무래도 무기력에 빠졌다. 모든 대답과 확신과 회유와 설득 같은 것들과 최대한 멀어지고 싶다. 내 밑천, 내 무지가 부끄러워서 귀를 좀 더 팽창시키기 위해서라도 입을 다물게 되는 날들이 분명 있다. 책을 읽을 때, 팟캐스트를 들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때 그러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들에, 대부분의 socializing에서 내가 입을 다무는 이유는 과장과 확신, 더부룩한 기름칠들, 의미없는 웃음들, 공갈빵처럼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는 빈말들, 그것들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다. 혹시 나도 그 말들의 오해에 입을 싣고 어딘가로 떠내려가버리는 결말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간은 오롯이 실존할 수 있지만 다수의 인간이 각자의 내용을 가지고 함께 하는 것은 내 머릿 속에서는 불가능한 상상이다.


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을 내가 언제 처음 읽었더라. 고등학생 때 였을까? 도대체 그 때 나는 책을 덮고 무어라 감상했던가. 테레자의 사랑에 감동하고, 토마시의 바람끼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중절모를 쓴 나체의 몸을 관능적으로 움직이는 사비나를 동경했을까.

 책에 순위를 매기고 싶었다. 별 다섯에 별 다섯를 주고도 모자랄 만큼 다시 읽은 이 소설은 가득차 있었다. 내 감상과 소설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짚고 감상문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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