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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13. 2020

아름다운 가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1. 등장인물 

'키치란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아름다운 가면', 키치 속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대한 이야기다. 


 사비나는 그림을 그린다. 배경이 그려진 화폭이 그녀 앞에 있다. '그림의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뒷편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사비나에게 진리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림 뒷편에 자신의 내밀성을 감춰두는 일이고, 그것이 찢겨졌을 때 그녀의 생존 방식이란 '배신'이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부모를, 조국을, 사랑하는 남자를 배신해야 했다. 그녀를 둘러싼 삶이란 참을 수 없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테레자는 배가 고플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 테레자는 거울 속 자신의 육체를 들여다본다. 그 육체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고 싶었다. 테레자를 지배했던 어머니의 세계란 모든 육체가 평등화된 세계다. 그 곳에서 테레자의 육체는 다른 어떤 육체와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싸는 일의 수행체에 지나지 않아야 했다. 그녀가 찾고 싶었던 '유일성'은 어머니라는 수용소에서 짓눌려 있아야 했다. 테레자가 책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토마시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녀가 원했던 것은 유일해질 자신의 육체였다.  꾸르륵 소리는 육체 속에서 의미(영혼)을 찾고 싶었던 그녀의 배고픈 소리였다.

 

 토마시는 'Einmal ist keinmal(한 번은 없었던 것과 같다)에서 태어났다'. 토마시가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인' 삶을 견뎌내는 방법은 수많은 여자들과의 섹스다. 그에게 유일성이란 모든 것이 벗겨진 여자들의 모두 다른 형체와 소리와 움직임에서 발견가능한 무엇이다. 토마시는 '지상에 머무르는 육체를 메스로 개봉하고자 하려는 욕망' 때문에 수많은 여자들과의 섹스가 필요하다.(그가 외과 의사라는 것은 그러므로 마땅한 설정이다.) 

테레자가 토마시를 찾아왔을 때, 그는 수많은 여자들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그녀를 보며 느낀다. 'Co-sentiment.' 소설에서 말하는 동정심이라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감정이다. '불행을 함께 겪는 것 뿐만 아니라, 고통 환희 행복 고민 등등 모든 감정을 함께 느끼는 감정적 텔레파시 기술.' 토마시에게 테레자는 보자기에 싸인 채 떠다니다 결국 자신에게 버겨진 가장 연약한 아기같다. 그는 테레자가 슬플 때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유일한 육체가 되고 싶었던 테레자의 욕망에 발맞춰줄 수는 없었다. 토마시에게 올바른 행동이 아닌, 원하는 바대로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섹스라는 곳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수용소를 벗어난 테레자는 이제 더 크고 슬픈 수용소에 살게 되었다.



2. 똥

 내가 사는 동네의 스타벅스는 키치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화장실 구조를 가졌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똥이 마렵다. 

 변기 앞에 서서 팬티를 내리는데 바로 정면에 커다란 거울이 있다. 내 음부를 향하는 듯한 각도로 살짝 기울어져서 나를 비춘다. 변기에 앉으면 내 음부와 내 얼굴이 거울에 함께 나타난다. 똥을 싸는 사람의 진지하고 희극적인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똥을 싸고 휴지를 뜯고 엉덩이를 닦기 위해 몸을 살짝 비틀 때까지도 거울에는 여전히 내가 비친다.

 거울은 누군가의 실수로 그런 구조로 그 위치에 달렸을지 모른다. 근데 또 어쩌면 화장실의 설계자는 의도적이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신의 똥 싸는 모습을 지켜보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빈틈없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화장실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타인들은 본 적 없고 볼 수 없는 얼굴로 똥을 싼다. 화장실 물을 내리면 똥 같은 건 흔적없이 사라진다. 이제 똥이 없는 세상에서 여자는 다시 아름답게 화장을 고치고 웃음을 흘리고 키스를 한다. 똥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아름답다. 화장실의 설계자는 그 아름다운 가면에 화가 난 것이다. 그는 인간들에게 가장 본질적이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이미지를 선물하고 싶었다. 똥을 싸는 자신들 말이다.


'변기 끝을 잡아당겨 물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휩쓸려 내려가면 육체는 자신의 추한 꼴을 잊고 인간은 자기 내장의 배설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도록 건출가가 불가능한 일을 실현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배설물로 가득한 베네치아 위에 우리 화장실, 침실, 댄스홀, 그리고 우리의 국회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똥을 싸는 내 자신을 보며 한번 더 생각한다. 

기쁘거나 슬픈 일들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야말로 똥이 해내는 가장 멋진 일이 아닐까. 삶이 행복과 기쁨으로 넘쳐나는 누군가의 인생에서 똥구멍으로 묵직한 똥이 쏟아진다. 그럴 때 누군가는 생각해야 한다. 아, 나는 똥을 싸는 인간이구나. 마찬가지로 삶이 눈물과 슬픔으로 젖은 누군가의 인생에도 똥구멍에서 똥이 흘러나온다. 그럴 때 그 누군가도 생각해야 한다. 슬픔도 똥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똥이야말로 정의롭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3. 키치

 사비나는 배신이 끝난 곳에서 공허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녀의 배신을 장식하지 않는다. 사비나는 키치를 경멸하지만, 초인이 아닌 이상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기도 한다. 나는 똥을 인정하는 사비나가 좋았다. 


 토마시의 여자 사냥은 테레자를 아프게 했지만, 두 사람이 원했던 게 달랐다고 말할 수 있나. 

 두 사람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에 있어 상충했을 뿐이다. 모두의 적은 똥을 배제하는 키치였다. 단지 키치에 맞서는 방법으로 토마시가 택했던 여자들과의 섹스가 유일한 육체가 되는 방법으로 키치의 수용소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테레자를 방황하게 했던 것이다.



4. Co-sentiment.

'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공산주의의 모든 감시와 처벌로부터 벗어나고자 토마시와 테레자는 아주 먼 시골로 옮겨간다. 그들은 원의 시간에 사는 개, 카레닌과 함께 평범하고 일상적인 규칙들 속에 살아간다. 

 암에 걸린 카레닌이 죽자, 테레자는 깨닫는다. 지금까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것은 카레닌 뿐이였다고. 그녀는 토마시에게 사랑을 원했지만, 카레닌만은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를 사랑했다. 테레자는 모든 약한 것들을 사랑했다. 몸뚱아리가 땅 속에 파묻힌 채 생매장당한 까마귀를, 도축되기 위해 기다리는 송아지를, 카레닌을, 꿈 속 토마시의 분신이였던 토끼를 위해, 그들의 아프고 슬픈 삶을 대신하여 테레자는 울어줬다.  

 토마시가 그녀에게 바라는 게 없을 때 테레자는 그에게 다른 무엇(사랑)을 원해 왔다. 오래도록 토마시가 늙어버리길 바랬던 테레자는 정말 늙어버린 토마시를 발견하고 슬프다. 이제 토끼처럼 작고 힘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토마시를 바라보면서 테레자는 애초부터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로소 테레자의 동정심 안에 힘 잃은 토마시가 들어오게 된다. 

 보헤미아(체코의 한 도시)는 자신의 이름을 잃었다. 사방에는 소련이 붙인 이름표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이제 두 사람은 외딴 곳에서 힘을 잃은 동물들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다. 까마귀처럼, 송아지처럼, 카레닌처럼. 힘없는 두 사람은 '슬픔이라는 형식' 속에서 서로가 함께 있다는 '행복이라는 내용'으로 슬픔을 채운다.


 

5. 필연의 키치

 우연이야 필연이야?, 생뚱맞은 내 물음에 우연이 필연이 될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놀랐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역사와 시간도 가볍게 흘러간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들은 수없이 바뀐다. 이 무의미한 직선의 시간 속에서 우연이 필연이 된다고 믿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초인이 아닌 인간들은 똥이 없는 키치 속에 살겠다는 오만함을 부리기도 하고, 그런 키치를 경멸하며 죽이겠다고 칼을 내뽑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키치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이런 키치를 갖고 싶다.

슬픔이라는 형식을 갖고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행복으로 슬픔을 채웠으면 좋겠다는 키치.


 똥이 마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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