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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16. 2020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 묻는다면

 1. 

 얼마 전부터 온라인 영어 스터디 그룹에서 사람들과 함께 영어 스피킹 연습을 시작했다. 이번 주 주제는 성공과 행복. 한 사람이 말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캐나다에 왔어요. 저는 성공을 위해 행복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제 아이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게 행복이죠. 다른 사람이 말한다. 제 건강을 지키는 게 제겐 행복의 가장 큰 부분이에요.  


 랄프 왈도 에머슨이라는 사람이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쓴 시가 있다. 그가 말하는 성공은 돈도 명예도 명성도 아니다.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초등학생이였는데, 성공에 대한 그의 순박한 시선에 어린 마음에도 크게 감동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걸 베껴 써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얼마나 멋진가. 

 

 내가 대답할 차례가 됐다. 캐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묻는다. 성공같은 건 내 인생에 없을 것 같아요. 뭘해도 어차피 실패할 거라고 예상해요. 조심스러워요. 얼마나 무시무시한 실패가 내 앞에 있을지 무섭거든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실패할 건 분명해요. 어차피 실패할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말했는데, 너 뭐라고 했어? 인터넷이 잠깐 끊긴 것 같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에 따라서도 성공과 행복에 대한 정의가 다르겠지만, 관념들에 대한 한 사람의 정의도 때에 따라 달라진다. 아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데,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어린 내 안에는 아빠와 학교가 가르쳤던 약육강식의 성공과 에머슨이 말하는 성공같은 게 공존했다. 얼마나 멋진가.

 

 나는 이제 자본주의적 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싫은 만큼이나, 에머슨처럼 존경을 바라고 싶지도 않다. 세속적인 성공도 없고 존경받아 마땅할 도덕적인 성공도 내겐 없다. 없고 싶다.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되는데 내가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조차 없다. 없고 싶다.

   

 내가 자라는 동안 우세해진 것은 소소한 행복론이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자본주의적 성공)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일이 행복한 일이라는 데에 동의하게 되었다. 

아이러니는 작고 소소한 행복조차도 돈의 보호 없이는 무너지기 쉽다는 데에 있다. 버버리힐즈의 부유층들이 퀴노아 유기농 샐러드를 먹으며 건강을 챙길 때 저소득층들이 식사를 때우는 곳은 맥도날드다. 누군가 돈이 벌어다준 시간에 운동을 하고 몸을 만들 때, 다른 누군가는 돈을 위해 하루 12시간의 몸과 노동을 바친다. 

 내가 사는 세상이 어디쯤에 있는지 깜깜할 때가 많다. 나는 버버리힐즈에 살지 않지만 판자촌에 살지도 않는다. 퀴노아 샐러드를 먹은 적 있지만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한 적도 많다. 집을 살 돈은 없지만 살고 있는 집은 있다. 내가 들은 정말 부자와 정말 빈자들의 세계는 간접적인 세계들이고, 나는 간접적인 이야기를 듣고서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내 친구들은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리다가도 그것을 잠시 접어두고 구경거리가 가득한 지도를 펼쳐드는 여행에 대한 꿈을 꾼다.  

 

 자본주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싫다고? 아무래도 나는 싫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낭만적일 수 있는 어디쯤에 살고 있다.    



2.

  사과나무에 매달린 탐스러운 사과 나무가 너무 아름다워 보이자 마음이 부푼다. 나는 사과를 하나 따서 내 손에 쥐고 먹을 수 있다. 달콤한 사과 냄새를 맡으며 한 입 베어무는데 달고 상쾌한 맛에 혀가 즐거워진다. 온 세상이 사과나무를 비롯한 온갖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하다면 그것들을 즐기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라겠지. 질릴 때까지 달고 아름다울 수 있겠지.

 고개를 돌렸다. 저 편에서 썩은 웅덩이와 썩어가는 나무, 오래 전에 죽어버린 새들의 시체가 여기 저기 깔려 있다. 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웅덩이 주변에 걸터앉아 힘없는 두 손에 썩은 물을 담아 먹는다.

 나는 여기와, 저기 사이에 벽을 세운다. 벽 건너 편에서 그 사과는 본래 누구 것이냐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본래부터 내 것이였다고, 그러므로 내가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대답한다. 당신도 봤다시피 내가 사는 땅에서는 썩은 것들 밖에 없어. 괜찮다면 사과 몇 개를 이리로 좀 던져줄 수 있겠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더 높고 두꺼운 벽을 쌓기로 한다. 다시 아름답고 안전한 세상이 되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향기로운 냄새와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들이 나를 반긴다. 나는 행복하다. 삶은 꽤 살 만한 것이다.


 이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예쁜 바보'가 되는 일과 같다.

 배가 고픈데 입 속으로 폭탄이 떨어지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뉴스를 읽었다. 썩어가던 땅은 갈라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떨어져죽는 꿈을 꿨다. 나는 안전한 곳에 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본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꿈쩍하지 않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뒷편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땅 위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기름 수영장에서 반짝이며 수영하는 여자와 그녀의 꽃무늬 비키니가 날아다녔다. 여자들의 아름다운 가슴과 발기된 성기들이 춤을 췄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다. 나란 인간은 지금껏 폭탄을 피해올 수 있었던 그저 운좋은 사물같은 것에 불과하다. 이 거대하고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와중에 밥을 먹고 웃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인간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폭탄은 언제까지고 나를 비껴갈까. 나는 내 몫으로 떨어지는 폭탄을 다른 이에게 던져 넘겨주지 않을 인간일까. 무엇을 장담할 수 있을까.

 행복한 얼굴로 행복하다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은 두껍고 높은 벽공사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벽 덕분에 성공한 얼굴로 성공에 대해서도 떠들 수 있다. 나는 그들을 예쁜 바보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부르기 전에 얼른 그들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리고 내가 속할 세상을 위해 벽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예쁜 바보도 아닐 수 있고 썩은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추상적이고 낭만적일 수 있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3.

<생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소설 <페스트> 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 without the encouragement of visible progress, without the hope of a positive end in sight, and always with the knowledge that death may win. They carry on all the same, because 'they knew it was the only thing to do.'"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눈에 보이는 성공에 대한 고무감, 행복한 결말에 대한 희망, 그런 것 없이, 결국엔 죽음이 이길거라는 인식을 항상 가지고(---). 그들은 같은 일들을 계속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Their will to survive is one with the thrust of life itself, a strength beyond hope, as stubborn as the upsurge of spring." (살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삶 그 자체가 가진 생동력에 있다. 희망을 넘어서는 힘 같은 것, 마구 피어오르는 봄만큼이나 집요하고 완강한 힘.)


 살기 위해서 (성공과 행복같은) 희망은 필요없다.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희망의 탈을 쓰고 무엇을 감추고 싶은 사람들이다. 성공과 행복과 희망을 비롯한 모든 악세사리들을 벗겨내도, 아니 벗겨냈을 때에야 삶은 그 자체로 힘(thrust)이다. 그 힘이란 건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고, 그 힘은 내가 무너질 때, 폭탄이 떨어진 세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러다가도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 때, 잠을 자고 폭탄을 잊고 살아갈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말과 밥과 애정을 나눌 때, 평지를 걷다가 내리막길로 떨어질 때,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책을 읽을 때, 책을 읽는 게 너무 좋을 때, 책을 읽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될 때,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데 오르막길을 올라야할 때, 뭘하든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 때, 그럴 때마다 언제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힘으로 무얼 하며 살까. 예쁜 바보가 되고 싶지 않고 썩은 물도 마시고 싶지 않겠지.


 아무것도 겪어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내 무지는 내가 아직 그 힘에 대해서 믿을 수 있게 만든다. 두려운 건 아직 내게 떨어지지 않은 폭탄을 상상하는데에 있다. 혹은 내가 떨어트릴 폭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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