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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20. 2020

억압, 그러나 너와의 사랑.

철학 대 철학(강신주 저)를 읽는 중에


. 철학 vs 철학 (강신주 저)


 허윤주의 휴가를 기다린다. 두 달 정도의 휴가면 좋겠다. 같이 '철학 vs 철학'을 읽고 싶다.

 예전에 아자님이 이 책으로 스터디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동참하지 않았을까. 함께 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까. '책은 도끼다'라는 책 제목이 있잖아. 겨우 서양 철학 12장까지 읽었는데(이 책은 총 66장으로 구성되었다), 열 두 번의 도끼 같은 뿅망치가 매번 정수리를 내리쳐. 하루에 세 장씩 읽은 날도 있었는데 그럼 내 머리는 과포화 상태가 되서 읽은 게 안 읽은 게 될 정도로 정신이 멍해지더라고. 하루에 한 장(챕터)씩, 더 읽고 싶어도 읽지 않고 대신 언니 말대로 머릿 속으로 이렇구나 저렇구나 생각을 해.


 고등학생 때 윤리를 너무 좋아했거든. 윤리책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 칸트 헤겔 흄 등등 정말 많은 철학자들이 나오는데 선생님이 어찌나 친절하셨던지, 딱 시험에 나올만한 것들로 간단명료한 정리를 끝장나게 잘해주셨거든. 시험 문제도 그 간단명료한 정리 그대로였어. 그 때는 선생님 너무 좋았어. 뭘 이해할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외우기만 하면 되게 가르치니까. 에피쿠로스=쾌락주의/ 스토아=절제/ 헤겔=변증법/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철학 대 철학>을 읽으면서 그 선생님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알게 됐어. 설명하기 귀찮았거나, 정말 몰랐거나 그랬겠지. 

 나는 여기 있는데(physical) 나를 훨씬 뛰어넘어 멀~리 있는(meta) 것들에 대해서 입으로 떠드는 게 철학 아니냐고 생각했거든(형이상학적인 게 철학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들뢰즈랑 니체에 대해 

'들으면서' sophia든 누구든 잘 사랑하려는(philos) 게 철학(philosophy; 지혜/앎을 사랑하다)이구나 생각하게 되더라. 



*들뢰즈

 타자는 나의 의식이 필연적으로 "나는 -였다" 속에서, 즉 더 이상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과거 속에서 흔들리게 만든다. 타자가 나타나기 전에 예컨대 어떤 안정된 세계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과 구분하지 못했다. 타자는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표현하며서 등장하며, 이 세계는 타자 없이는 펼쳐지지 못한다. 나? 나는 나의 과거 대상들이며, 나의 자아는 바로 타자가 나타나게 만든 한 과거의 세계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이다.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 <의미의 논리> 들뢰즈


 중세에는 절대자(신)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게 절대자에게 모든 걸 물어보면 되는 질서에 살았다. 암흑의 시대가 끝나고 근대에 와서야 주체(인식하는 나)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흄이나 칸트같은 철학자들은 오직 주체의 영역 안에서만 동정심을 발휘하고 도덕 법칙을 세웠다. 그 동정심과 도덕 법칙을 가지게 된 자신들에게 도취된 나머지, '나의 동정심과 윤리학을 관철시키는 것이 타자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지는 못했다.

 타자의 윤리학이란 '주체의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삶의 짝으로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타자란 절대자로써의 타자(신)이 아니라, 나와 같은 상대적인 타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신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는 유한자이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고 보완해줄 타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들뢰즈는 말한다. 타자는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을 보고 있고 나는 타자가 볼 수 없는 부분을 보고 있다. 타자는 세계 안에서 여백이면서 동시에 내가 그에게로 돌아가면(전이), 그래서 '그의 봄과 나의 봄이 합쳐지면' 그 때 대상의 '총제적 봄이 달성된다'고. 나는 타자와 마주침으로 인해 낯섦을 느끼고 나를 반추하게 된다. 이제 내 앞에는 두가지 갈림길이 있다. 과거 내 모습으로 후퇴하거나 타자와의 마주침을 지속하거나. 이러한 마추침은 나를 변하게 한다. 나는 '새로운 배치', '생성'을 실현한다. 그러니까,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이 말은 매번 다시 들어도 나를 멈추게 한다. 

  여기서 함정은 '나의 세계가 완전하려면, 타자는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나의 타자는 항상 진실만을 얘기할까. 


 나는 타자(예를 들면 남자친구)가 항상 진실 만을 이야기하길 바랬거든.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남자친구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나는 그런 남자친구에 대한 염원이야말로 절대자를 믿는 것과 다름 없이 순진무구한 환상이라고 생각하게 됐어. 내 경험에서는 타자는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존재가 아니더라고. (나는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하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나 말고 타자의 진실! ) 진실할 수도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는 타자 앞에서  불안한 나의 생존 전략은 뭐였을 것 같아? 나는 내 삶에서 타자가 취할 수 있는 입지를 슬며시 줄여나가려고 애썼어. 여전히 타자의 자리는 남겨둬야 했지. 타자없이는 내가 살 수 없다는 건 짐작했으니까. 어쨌든 나는 그가 내게 돌아올 수 있는(전이) 자리는 항상 남겨뒀지만, 믿을 수 없는 타자가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넋놓고 있을 수는 없었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경계 태세를 갖춰서 좋을 게 뭐냐고? 그래야지 배신당할 내가 좀 덜 아플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들뢰즈를 데리고 나온 강신주가 '모험'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멍청해 보일 정도로 단호한 믿음, 그리고 맹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애정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타자에게로 건너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 타자에 대한 믿음과는 격이 다른 성숙한 믿음이다. 배신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세속적 타자를 믿는 것은 수십 배나 더 어렵다. 그러나 배신이든 보답이든 그것은 모두 신뢰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 아닌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는 결국 바람을 피웠던 것 같은데, 맞지? 어렸을 때 책을 읽으면서 안나가 참 멍청하다고 생각했어. 어쩜 그렇게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줘버렸니? 브론스키가 너를 배신할 가능성은 생각해보지도 않은거야?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 바보야? 

남자친구를 믿을 수 없다고(뭐에 대한 믿음이였는지는 생각이 안나) 친구가 고민상담을 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어. 그럼 믿으려고 그랬어? 지나가는 개를 믿는 게 낫지.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믿지 않는 건 믿지 않는 거 아냐?


 나는 왜 멍청해 보일 정도로 단호하게 믿지 못할까. 나는 왜 맹목적으로 사랑할 용기가 없을까. 왜냐하면 나는 누구보다 나를, 나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이건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자각이야.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를 사랑하기로 하는 것 말고, 그를 사랑해서 그가 나를 부숴버릴 때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파멸을 마주할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니체

 칸트가 현상 세계 너머 물자체(초월론적 대상)에 대해 말할 때, 니체는 칸트에게서 플라톤과 기독교의 냄새를 맡아. 뭐라고? 우리가 표상(현상 세계)를 감각하지만, 우리가 감각하는 이 표상이 물자체 그 자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을 거라고? 니체는 여기에 반박한다. 그럼 그 물자체라는 게 뭣이 그렇게 중한디? 

 니체는 무엇보다 '먼저 현상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같은 건 현상 세계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라고.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기독교가 만든 신 앞에서 인간이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처럼 칸트의 물자체는 인간의 자발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런 칸트의 반대편에서 니체는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 세계 자체를 긍정하자고 말한다. 니체의 초인이란 '현상 세계를 긍정하는 인격'이다.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는 점(단순한 인간적 해석 이외에 다른 해석들도 어디선가 가능하다는 것), 지금까지의 해석들은 우리가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생명, 그 힘에의 의지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점주의적 평가들이라는 점, 인간의 모든 향상은 편협한 해석들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점, 힘의 강화나 증가는 새로운 관점들을 열어놓고, 새로운 지평들을 믿게 한다는 점, 이런 생각이 나의 저작들을 관통하고 있다,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니체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란,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산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과 같은 맥락에 있지만, 전혀 다른 의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속이 아니라 창조다. 

 나는 니체가 '단순한 인간적 해석 이외에 다른 해석들'에 대해서 언급한 것에 감탄했다. 그의 관점주의는 동물들의 관점도 포함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데카르트는 영혼이 없는 동물들은 기계와 같은 거라고 주장했다. 그가 살았던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전근대적 시대에서는 이치에 맞는 말이였을지 모르지만,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이 이후로 많은 동물들이 학대받는 것에 일조한 건 틀림없다. 데카르트를 생각하면 니체는 혁명적이다.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온 시선이 인간 중심주의의 오만에 빠져 있을 때 니체는 인간적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에 대해서 말한다. 그게 바로 생성이고 창조 아닐까.    


 또한 니체는 '망각'에 대해서 긍정한다. 

새로운 음식을 먹기 위해서 위를 비우는 것처럼 정신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망각이 필요하다. 음식이 일정 정도 위에 머물러야 하는 것처럼 일시적인 기억은 긍정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인칭성'이다. '정신의 자기 변형'이다. (내가 언제까지고 나(A=A)인 게 아니라, 과거의 나가 새로운 나로 변형하는 순간에 가지는 성질을 비인칭성이라고 하는 것 같아.)  

'나'는 '과거의 나'와 같지 않다. 우리는 '생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 '과거의 나'와 같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낙타일 것이다. 진정 무서운 것은 무의식적인 억압의 기억이고, 낙타는 언제까지나 내면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제 2의 본성, 자신이 가진 억압적인 기억을 의식하지 않은 채 그 기억의 짐을 메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낙타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사자에게는 누구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는 자이다. 그러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다. 니체는 기억을 잊고 자유를 쟁취한 사자가 결국 되어야 할 것은 '어린 아이'라고 말한다. 


강신주를 통해 내가 이해한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과거의 나'였던 게 있고, 타자와 마주침으로 인해 생겨나는 '비인칭성', 즉 과거의 나(억압된 기억)을 잊고 새로운 타자와의 마추침에서 섬광처럼 작열하는 순간이 있어야만 '새로운 나'가 생성/창조된다고. 우리의 삶은 '나'라는 동일한 인칭(A=A)이 견고하게 지속되는 낙타의 삶이 될 수도 있다. 낙타는 견고하게 사회와 관습과 도덕과 법률이 정해주는 억압을 업고 살아간다. 

억압을 벗기 위해서는 나는 과거의 나를 망각해야만 한다. '나'는 빈공간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자유를 향해 사자로 태어나야 한다. 자유를 얻은 사자가 이후로 되어야 하는 것은 어린아이다. 기억의 억지스러움과 무거움을 벗고 처음처럼, 어린아이처럼 너(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매번 어린아이처럼 너를 만나고 다시 태어난다. 


 겉으로 드러난 지배와 억압과 폭력에 대해서는 친구들과 맥주를 앞에 두고 실컷 떠들 수 있다. 거나한 수다를 끝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마주해야할 게 고독 뿐일 때 나는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술집에서 내가 낸 목소리가 감추고 싶었던 다른 진실은 아무도 없는 내 빈 방에서 너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진실이란 내 안에 제 2의 본성, 무의식에 있는 복종이다. 나는 내 안 깊숙이 존재하는 보드라운 멍청함을 덮기 위하여 내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세상에 대해서 실컷 떠든다. 그러니까 나는 낙타인 채로 술집에서 타인들을 마주친다. 이미 무거운 낙타에게 타인은 또다른 짐이 될 뿐이다. 짐이 무거워서 잠시 앉아 맥주로 입을 축이면 짐이 가벼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네가 아닌 맥주를 사랑하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 내 안에, 내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는 주홍글씨를 의식하는 일을 잘하고 싶다. 어린아이가 되는 일은 바라지도 않는다. 자유?도 모르겠다. 나는 초인이 아니므로. 내가 바라는 것은 내 무의식에서 살고 있을 억압에 대한 기억을 의식하는 일이다. 그게 억압임을 아는 것. 그게 시작일 테니까.



*책과 저자 소개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을 동등한 질과 양으로 다룬다는 것, 어떤 한 철학자나 그의 논의를 깊게 다룰 수는 없지만 철학 자체에 대한 넓고 얕은 이해를 맛보게 해준다는 점, 각 챕터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문턱이 낮은, 대중적인 접근을 취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인 텍스트인 척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는 좋았다. 


각 챕터(서양 33, 동양 33, 총 66개의 챕터)는 논쟁이 되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하여 두 철학자가 싸우는 구조를 취한다. 물론 질문도, 질문을 두고 싸울 두 철학자들도 강신주가 선정했다. 질문들은 흥미롭고 양쪽 진영에서 튀어나오는 철학자들의 목소리는 더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강신주의 해설은 나를 그들의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게 만든다. 특히 들뢰즈와 니체에게 그렇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가장 먼저 읽고 싶다.


 철학자가 "억압된 자들의 전통(발터 벤야민)"에 서지 않는다면, 그건 철학자가 아니라는 강신주의 말에 잠시 멈추고 생각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지만 내가 서야할 곳을 반드시 정해야 한다면 억압하는 자들의 맞은 편 어딘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여야 할까. 나는 한 명의 억압된 자로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체제의 편에 서 있는 철학자들과 억압된 것들의 편에 서려고 했던 철학자들. 체제에 기생하는 사람들과 그것으로부터 몸부림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 강신주를 싫어하는 지점에서 나는 그를 가장 좋아한다. 자신이 틀릴 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는 틀리지 않을, 모호한 입장을 취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쪽과 저쪽도 잃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그들의 항변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어차피 틀릴 것을 아는 사람은 분명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어차피 객관적인 세계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주관적으로 계속해서 틀리면서 생성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갈 수 있는 가능성만큼 타인을 떠나야하는 가능성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 있을 때, 여기 있는 내 목소리를, 억압을 버리는 목소리를 마음껏 내야 한다. 나는 그의 어쭙짢은 배려 없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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