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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Oct 27. 2020

글 안 써도 밥만 잘 먹더라

 다행히 영어 시험은 통과했다. 대학마다 인정해주는 영어 시험이 조금씩 다르지만, 아이엘츠나 셀핍은 어딜가나 인정받는 것 같다. 나는 아이엘츠를 선택했고, 내게 주어진 기간은 한 달이였다. 수능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 빡센 시험 공부였다. 한 달 동안 나는 바삭하게 말라가는 혹은 썩어가는 과일 같았다. 하루하루 내 뇌의 한계를 절감해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였다. 

 때때로 한계는 운빨로 커버된다. 빌어먹을 라이팅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역에서 나는 8점을 받았는데, 그 공을 끝까지 지조를 지켜준 내 무거운 엉덩이에게 돌리고 싶다. 


 UBC(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 제출해야 하는 Personal Profile의 질문들은 꽤나 거청하고 심오했다. 1)Describe who you are, 2)What are you proud of yourself?, 3)What is important to you? 시험 성적을 받자마자 이제 Personal Profile을 쓸 차례라며 기분 좋게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고, 그 이후로 일주일 동안 딱 한 글자를 썼다. 'Cameleon.' 나는 내가 누군지 생각해보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할만 한 게 있는지도 생각해보고, 나한테 중요한 건 또 뭔지 착실하게 생각했지만, 왠지 카멜레온이 되고 싶다는 말 밖에는 쓸 수 없었다. 후에 마크에게 프로파일 교정을 부탁했을 때 그는 이렇게 조언했다. 

'캐런 카멜레온을 갖고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 것 같은데, 영어에서 카멜레온은 훨씬 부정적인 의미를 가져. 예를 들면, 이랬다 저랬다 하거나, 속과 겉이 다른 아주 지조 없는 사람같은.' 

 나는 의도치 않게 진실을 써버린 건지도 모른다. 너무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나니까 카멜레온은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래, 이건 대학한테 나를 뽑아달라고 쓰는 글이야. 카멜레온 같은 감상적인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해야할 말만 똭, 명확하게 간결하게 해보라고!' 그나마 지조있는 엉덩이의 힘을 빌려서 프로파일을 마무리 지었다. 76불까지 결제하고 나니까 UBC undergraduate program의 신청자가 되어 있었다. 아이엘츠 시험을 한 번 치르는데 300불이 들었고, 시험을 준비하면서 italki에 쓴 돈도 그쯤 되고, 대학 입학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또 돈이 든다. 1년 학비가 대충 5000불 정돈데, 이건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에 한해서고, 국제 학생들은 그것의 두 세배를 부담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대학가는 것도 힘든 치사한 세상이다.


  영어 시험을 치르고 대학 입학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 큰 불안함을 얻었다. 내가 내 예상보다 멍청하다는 자각과 아무것도 쓰지 않고도 너무 잘 살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앞의 불안함에 대해서는, 멍청해도 어쨌든 시험은 패스했고, 혼자서 스스로 꽤 영리하다고 착각해왔던 걸로 결론지으면 불안할 이유가 더는 없다. 

 좀 더 실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글을 쓰지 않고도 (일기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내 일상이 별다를 것 없이 잘 굴러갔다는 사실에 있다. 영어 시험이 끝나고, 프로파일을 마무리 짓고, 일주일이 더 흘렀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긴장이 풀린 몸은 지쳤고 책과 글쓰기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 일상은 실망스러웠다. 내가 글쓰기보다 영어 공부에 더 적합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밤마다 혼자 와인을 마셨다.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었다. 와인으로 입을 축이고 있자니 말라버린 머릿 속이 더 건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무슨 책을 읽어도 잘 읽히지 않았는데, <여자 둘..>은 너무 재밌다. 김하나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대출금' 사연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랫동안 내가 영어공부에 더 적합한 인간일 거라는 예상과 선긋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

  김하나와 황선우가 집을 함께 샀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갚아야할 대출금인데, 때마침 김하나는 작게 꾸려오던 브랜딩 회사를 접게 된다. 일자리를 잃은 그녀는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 들어오는 일은 무조건 다 하기로 한다. 아니 다 해야 했다. 그는 강의와 강연과 원고 쓰기를 '맹훈련' 하듯이 해나갔고, 그 와중에 계속해서 스스로를 보완해 나갔다. 그 때 쓴 원고들로 책을 냈고, 그 인세로 대출금을 갚았다. 이후로 포텐이 터진 김하나는 팟캐스트의 고정 진행을 맡고, 라디오에서도 고정 코너를 얻고, 이제 하나의 어엿한 브랜드가 되었다. 


 언젠가는 아이엘츠 시험을 한 번 쳐봐야겠다고 습관처럼 말해오면서 한 번도 수행하지 않았던 일을 이번 한 달 만에 끝낼 수 있었던 이유는 자명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달 동안 내가 영어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모조리 시험 때문이였다. 김하나에게 갚아야 할 대출금이 있었다면 내게는 치뤄야 할 시험이 있었다.  

 

 내가 글쓰기에 더 적합한 인간인지 영어 공부에 더 적합한 인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데 누가 알겠나. 대신 내가 글쓰기에 적합한 인간이고 싶다면 그런 적합한 인간을 키울만한 대출금 같은 게 필요하다는 걸, 특히 나 같은 카멜레온 인간한테는 꼭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나는 10년 동안 언제라도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만 해왔는데, 이런 식으로 글을 쓰다가는 왠지 언제나 질척거리고 재미없는 이야기만 하다 말 것 같다. 우중충한 결말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나는 글을 안 써도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밥을 먹고 먹어도 너무 잘 먹는다. 그래서 너무 다행이지만 그런 내가 꼴보기 싫을 때가 아주 많다. 내게는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없었고, 지금 나는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만이 꼴보기 싫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일 거라고 믿고 있다. 천재들은 말한다. '그걸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 그런 발언은 나와는 너무 먼 세계에 존재해서 내가 그곳에 가닿을 가능성은 제로다. 범속한 사람이 하고 싶을 것을 지속할 수 방법은, 하고 싶은 것을 좀 더 잘할 수도 있을 방법은, 그것을 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천재들이야 맹훈련을 할 수 밖에 없는 내재적 상황을 타고날 테지만, 타고난 게 없는 나같은 사람한테는 외부적인 상황 설정이 꽤나 중요하다는 현실 인식이 든다. 싫든 좋든, 오늘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 페이지의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규율같은 것 말이다.   

 그 외부적인 상황이란 게 어떤 조건이면 좋을까. 글 한 편을 걸고 돈내기라도 해야 하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부디 귀뜸해주기를. 


  그 사람 없이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의외로 내가 너무 잘지내서 놀랐던 적이 있다. 책과 글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의미는 결국 내가 부여한 것이였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의미를 부여한 것에 좀 더 책임을 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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