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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Dec 01. 2020

500만원.

  돈 오백을 빌려줬다. 아까운가. 아깝고 말고. 차용인은 남자친구님이다.

 남자친구는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재산을 그러모아도 돈이란 늘 부족해서 내 돈 천만원을 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말했다. 하루가 지나서 후회했다. 아무래도 천만원은 안되겠다고 말을 바꿨다. 서운해하는 그를 보면서 다시 마음을 바꾸고 싶었다. 너한테 빌려줄 돈 없다고. 벼룩의 피를 빨아먹어라 이놈아.  


 너무 하고 싶은 게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엄마는 새벽마다 과일 가게 샷시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했고 여름에는 수박을 나르고 겨울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과일 배달을 다녔다. 엄마가 돈을 벌어오는 동안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오십만원짜리 괴외를 받고 백만원짜리 여행을 가고 이백만원짜리 등록금을 냈다. 나중에는 그 등록금을 몰래 빼돌려서 호주로 갔다. 일하는 게 거지 같아서 때려치울 때마다 엄마한테 돈을 보내달라고, 태연히 요구했다. 나는 땅바닥에 발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인간이였고, 우리 엄마는 그런 나를 사랑하는 인간이였다.


 노동이 생활이 되었을 때, 엄마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과일 가게를 접고 나서 엄마가 선택한 일은 구제 옷가게였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일을 너무 좋아했다. 엄마랑 아빠가 함께 과일 가게 일을 할 때 아빠는 화가 나면 에이 씨발 욕을 뱉고 술을 퍼마시느라 며칠이고 가게를 비웠다. 엄마가 단 하루의 쉬는 날 없이 이른 새벽 가게 샷시를 올릴 때마다 아빠는 늦게까지 잠을 퍼잤다. 나는 한 번도 우리 집 가장이 아빠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밥벌이를 미루지 않았던 사람은 엄마였고, 나는 엄마 덕분에 머리를 예쁘게 빗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엄마는 구제 옷더미에서 옷을 골라내고 나면 손가락이 시큼거리고 아파서 골골거렸다. 내가 카페에서 9시간씩 서서 일하는 날에 기진맥진 땅바닥에 드러누워 '내 다리, 내 다리 아파.'하고 징징대는 것처럼, 그 때 엄마도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프다.'하고 꼭 말했다. 다리가 하루 아프고 말면 한 번 징징대고 말건데, 습관처럼 다리가 아프면 서러워진다. 내 다리가 아플 때마다 엄마 손이 생각났다. 먼지와 버려진 옷들이 쌓여 만들어진 동산을 올라타며 물건을 골라내는 엄마의 재빠른 손가락 마디들을 생각했다. 

 엄마 손가락의 쑤심을 내 두 다리에 옮겨 놓는다. 이제 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조금 이해한다. 엄마가 울 때 나는 그녀를 안아줬던가. 오랜 시간동안 나는 나에게 취해 있었다. 내가 땅을 밟고 내 걸음을 걷기 시작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엄마는 내 발판이 되는 일을 자처했다. 나는 아빠를 욕할 수가 없다. 나야말로 그와 가장 비슷한 인간이다. 우리 두 사람은 엄마를 밟고서야 겨우 살아갈 수 있었다. 

 이제 엄마 돈을 쓰고 싶지 않다. 쓸 수가 없다. 엄마 손가락이 아파서 번 돈은 오로지 엄마 자신을 기쁘게 해줄 무엇에 쓰였으면 좋겠다. 더 이상 아무도 그녀 것을 빼앗아가지 않아야 한다. 나는 엄마가 슬픈 영화를 보고 슬프게 울길 바란다. 엄마 인생을 두고 서럽게 울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500만원을 앞에 두고 남자친구가 서운한 빛을 내비췄을 때 그 애 뺨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엄마에게 준 가장 큰 용돈은 50만원인데, 그건 내가 가장 대범할 수 있는 돈의 단위가 딱 그 정도란 말이다. 500만원을 그에게 쥐어줬을 때 나는 자발적으로 조금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처음에 그가 천만원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예스라고 대답한 걸 보면 그때부터 정신줄이 끊겼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앞으로 학비가 얼마나 들지를 대충 따져만 봐도 천만원은 무리였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남자에게 큰 돈을 빌려주고 사기 당하는 여자들이 생각났다. 나는 물론 그녀들의 어리석음을 욕했다. 어떻게 저렇게 멍청할 수 있지? 돈도 있는 사람이 빌려주는 거지. 

천만원을 오백만원으로 낮춰서 준 나는 그녀들보다 조금 덜 어리석은 건가.


 나는 엄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럴까봐 겁난다. 엄마처럼 서럽게 울고 싶지도 않다. 그냥 슬픈 멜로 영화를 보면서 거짓말 같은 눈물을 흘리고 싶다. 그래서 악착같이 내 몫을 챙기기로 한다. 

 나는 내 옆사람으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을 챙겨먹을 마음도 없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순전히 그를 위해서 잘 되길 바랄 뿐이다. 남자친구는 말한다. 이게 잘되면 내가 너 편하게 앉아서 책읽고 글쓰는 삶을 살게 해줄 수도 있다고. 나는 웃기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내 삶을 더 나은 무엇으로 고양시켜주길 원해본 적 없다. 그것을 소망하는 내 자신이 역겹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현된 삶 뒷편에 알게 모르게 존재할 위계를 이미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의 일이 성공적일거라고 예상하지 않지만) 단지 옆에서 그의 꿈을 응원하고 싶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일찍 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응원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랑은 오백만원이 아니라 천만원을 빌려줄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르고, 사랑은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내 몸이 닳도록 노동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 밥을 먹이고 머리를 빗기는 일일지도 모르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꿈꾸는 삶을 꾸며주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모를 무엇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함부로 말하길, 지금 내게 사랑이란 나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무엇을 갈취하지 않는 것, 그가 망할 확률은 크지만 한번이라도 꿈을 쫓고 싶다고 말할 때 나를 생각하는 대신 그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다. 아무도 그 이상의 사랑을 지금 내게 요구하지 말길.   

   

 너무 강력하게 하고 싶은 것 앞에 서 있는 남자친구는 내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동안 나도 그를 잘 보고 싶지 않다. 관계란 언제나 치사해지기 쉽고, 위태롭다. 돈이 문제인지 마음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에게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꽥하고 소리를 지르고 돌아서는데 그도 소리쳤다. '너도 마찬가지야!' 끼리끼리 논다고, 돈없고 이기적인 인간 둘이서 오백만원 앞에서 못나게 굴었다. 사랑은 없어지고 돈만 불뚝 솟아버리는 그렇고 그런 세계에 속할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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