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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Dec 02. 2020

구질구질함에 순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사람>을 읽고

여의도에 있는 시가 20억의 60평대 아파트에는 서른 살의 두 아이 엄마가 산다고 한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을 고용할 형편이 되는 덕분에 남편과 함께 파인 다이닝에 가서 일상적인 데이트를 즐기고, 그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칭찬과 애정을 듬뿍 받으며, 샤넬로부터 꽃바구니까지 선물받는, 그야말로 최상의 평온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여성이다. 그 행복을 혼자서 감당하기에 벅찬 그 분은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로서 많은 여성들의 워너비로 추종받나보다. 제니스는 그녀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제니스도 그녀처럼 살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불가능하죠. 저한테는 너무 불가능한 삶이라서 그냥 꿈만 꿔요.' 


 카렌은 누구처럼 살고 싶냐고 제니스가 묻는다.  


 노들야학이라는 게 있다. 팟캐스트 <강섬의 유혹하는 책읽기>에서 고병권의 에세이를 읽어준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들야학의 존재를 처음 들었다. 이후로 이상하게 노들야학이 계속해서 들린다. 친구가 보내준 칼럼에서도, 은유의 글쓰기 책에서도, 김원영의 책에서도. 그러다가 홍은전의 <그냥, 사람>을 읽게 되었다. 읽는 게 힘들었다. 한 편씩 읽을 때마다 나란 인간이 싫어졌다. 두 세편을 연이어 읽은 날에는 세상도 싫어졌다. 근데 제니스가 나한테 누구처럼 살고 싶냐고 물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사업가들도 대단하고, 아는 게 많아서 할 말도 잘하는 지식인들도 대단하고, 인스타그램과 유투버의 인플루언서들도 대단하고, 대단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그들의 대단한 이야기 앞에서 나는 더할 것이 없어서 별 것 없는 인간이지만, 내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근데 노들야학을 알고나서부터 나는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내 인생이 거짓말 같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있는 친구가 내게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에 대해서 말해줬다. 몸의 경험으로써가 아니라 똑똑한 이성을 통해서 페미니즘을 알고, 그것을 하나의 상품 혹은 라이프 스타일로 취급하는 것을 두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친구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모든 것에 있어서 '라이프 스타일 무엇'이지 않았나 싶다고 고백했다. 친구끼리 닮는다고, 혹은 닮아서 친구라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아는 것과 알게 되면서 앓는 것은 다르다. 무엇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구미에 맞게 이용해 먹을 수 있고, 영 자기 입맛에 안 맞을 때에는 능력껏 각색할 수도 있다. 무엇을 알게 됨으로써 앓게 된다는 것은 내게 밀려오는 것들을 온몸으로 맞부딪치며 통과하는 일일 것이다. 아마 내가 부서지는 일일 것이다. 

 아는 것과 감당하는 것 사이에는 강 하나가 있다고 한다. 나는 알게 된 것을 감당하고자 강을 건너는 일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알기 때문에, 더 아는 게 무서워져서 떠나왔다. 


 누구처럼 살고 싶냐고 물으면, 감히 홍은전과 그녀가 쓴 이야기들에 대해서 들려주고 싶다. 홍은전에게 '좋은 사람'이란 좋은 비장애인, 좋은 이성애자처럼 들린다. 그녀는 '좋은 동물'이 되고 싶어졌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것이 그녀의 소망인 동시에 결심처럼 들렸다. 

 내가 차지한 자리에서 베풀 수 있는 시혜를 베풀면 좋은 사람으로 불리기 쉽다. 내 자리보다 한 계단씩 더 높은 자리로 오르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는 삶도 좋은 삶으로 이해되는 세상이다. '아무리 생각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은 일들을 마주할 때 내 자리에서 내려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애쓰는, 그래서 결국 앓게 되는 삶을 사는 것은 '좋은 동물'일 때만 가능하다. 인간은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월등한 이성 능력을 가지게 된 동시에, 타자를 느끼고 공감하는 접촉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느끼고 연대하는 일을 회복하는 것 아닐까. 

 홍은전 같은 멋진 동물이 되고 싶다. 자기 밖에 모르는 나같은 동물한테 가능할 일일지는 모르겠다. 불가능을 꿈꾼다는 점에서 나와 제니스는 다를 바가 없다. 


 이성복 시인은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고 말했다. 시인이 말한 능력의 자리에 삶을 넣어본다. 홍은전의 글은 그녀가 사는 삶이다. 홍은전은 그가 사는 만큼만 쓰는 사람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구처럼 쓰고 싶냐는 질문에도 홍은전이라는 사람을 아는 척하고 말 것이다.   


 샤넬백과 파인 다이닝은 내 스타일이 아닌 게 분명한데, '구질구질함에 순교하는' 동물이 되는 일이 내가 될 수 있는 일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영원히 라이프스타일 비건,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글쓴이로 그치고 말 내 앎을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다. 앓아본 적 없는 이의 지루한 넋두리다. 


 '김소연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의 구질구질함을 이해한 자는 그 구질구질함에 순교한다.'  - <그냥, 사람 중에서/ 홍은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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