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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Nov 13. 2020

루저의 자존감


 이번 주만 세 번째다.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라고 털어놓는 사람들을 만난 게.

  A는 가진 게 많아 보이는 다른 이들의 삶에 비해 자기 것은 별 것 없어 보일 때가 많다고 말했다. B는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5년쯤 뒤에는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곤거렸다. C는 언젠가 여자 친구가 못난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지도 모르겠다는 염려를 털어놨다. 


  어학 사전에 자존감을 검색해보면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영어 사전에서는 'confidence in one's own worth or abilities'라고 정의한다. 이 둘의 의미를 합쳐, '자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가치있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을 자존감이라고 해보자. 정말 멋진 마음이고 얼마나 멀어보이는 마음인가. 

 

 나는 자라나는 동안 존중의 시선보다 평가 당하는 것에 익숙했다. 

 나와 내 친구들의 성적은 시험이 끝날 때마다 등급이 매겨진 채로 학급 게시판에 전시되었고, 성적에 따라 공부할 수 있는 방도 달랐다. 전교 1등에서 10등까지는 가장 튼실한 책상이 주어진 널찍하고 조용한 특별 공간이 주어졌고, 11등에서 35등들을 위해서는 그보다 좀 덜 특별한 세컨드룸에서 한뼘 더 작은 책상이 마련되었다. 35등 이하의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들만의 공부 공간이 따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대로 자기 교실에서 야간 자율 학습을 마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뭐 그런 차별이 다 있었나 싶지만, 그땐 우리 모두에게 성적에 따른 차별 대우가 당연한 현실이였다.  

 우리가 자라온 환경을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이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건 드문 일일 수 밖에 없다. 평가 당하고 경쟁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가치 있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기 어렵다. 그건 오직 소수의 이긴 자들의 몫이다.

 나는 자주 한국의 교육 제도에 분노를 느낀다. 그것은 상위 10%만을 위한, 철저한 계급 교육이다. 공부를 아~주 잘하지 않으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이 갖는 의미는 쉬이 쪼그라들고 만다. 시험에 망할 때마다 줄지은 평가와 엄격한 내쳐짐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얼마만큼 가치 없을 수 있고 무능할 수 있는지 배웠다.


 학교를 벗어나자 다른 종류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 값이 어느 정도 되는 대학교에 다니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외모의 수준은 몇 점인지 등등에 따라서 나는 다시 쟤보다는 낫고 얘보다는 별로인 사람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부모님 직업을 묻거나 남자친구 직업을 묻기까지 했다. 평가에는 한계가 없었고 사람들은 존중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한국에 사는 동안 나는 누군가로부터 존중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감각해보지 못했고, 내 자신을 존중할 방법의 끄나풀 잡아쥘 여력이 없었다. 나는 내가 무엇도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뭐라도 있는 척 연기하는 일에 몰두했다. 서로를 판단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생존 방법이란 가장 그럴싸한 가면을 쓰는 일이었다. 가면을 꾸미다보면 하루가 다 갔고 나는 지쳐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네가 바로 루저로구나. 너는 이길 줄 몰라서 한국에 살 수 없는 거야 이 루저야.' 그는 내 가슴을 후벼파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왠일로 그가 예리했구나 싶었다. 정답이였다. 나는 이길 수가 없어서, 매번 지는 것에 지친 루저였기 때문에 한국을 떠났다.

 나를 판단하는 눈들이 사라진 미지의 장소에서 이방인이 되었을 때 자유를 느꼈다. 이방인인 나에게 이방인인 그들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지어주는 별 의미 없는 미소가 좋았다. 내게 필요한 모든 선의는 그 정도로 족했다. 친구들은 외롭지 않냐고 물었지만 나는 외로워서 좋다고 말했다.


 루저가 자존감을 지켜내는 일은 가능할까. 


 내게 자존감이란 마음의 초록 불빛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에 다름 없다. 그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잘 해냈을 때에야 드는 마음도 아니다. 내 자존감은 내가 변화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과 의지의 자발성을 먹고 자란다. 

 연애를 하면서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 너는 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냐는 말이였다.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하는 허튼 소망을 품은 적은 있었어도, 변치않는 고정관념과 악습에서 헤어나오지 않는, 고정된 자기 자리를 고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니였다. 둘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라도 자발적인 변화를 감당하지 않을 때, 그것은 헌 것이 되어버리고 이내 시들해져서 끝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개인의 삶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일부 나르시스트들의 몫이거나 게으른 희망주의자들의 바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없다.('있는 그대로'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세상이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때마다 다른 상황들에서 다른 액션을 취하는 한 개인이 있을 뿐이다. 이 개인이 특정 상황에서 취하는 행동들 사이에는 연관성과 일관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한 개인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은 마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환상이고 타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은 마음은 게으른 폭력성 때문이다. 

 상황과 더불어 시간에 따라서도 우리는 변할 수 있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는 충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가능한 만남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 내가 "첫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니체를 만나서 그 말에 깊이 감명받게 된다면, 그때부터 나는 어제와는 다른,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 좀 더 애쓰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개인들을 단순화시키기 좋아한다. 쉽고 편하기 때문이고, 가진 자들의 우월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다. 그들의 라벨링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는 그대로 어떤 사람이라고 믿어버리면 다음으로 나아가는 일이 힘들다. 낮은 자존감은 사회가 내게 부여하는 일차원적인 이름표에 우리 스스로 응답하면서 비롯된다. 그들이 판을 깔고 내가 두텁게 쌓아올리기 시작한 나의 모습, 나의 한계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할 때 자존감은 낮은 위치의 관성을 유지한다. 

 내 자아에 대한 고집 버리기 연습을 할 때, 나는 좀 더 풍부한 사람이 될지도 있다. 한계를 발견한다고 해서 한계가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한계를 앞에 두고 내일은 좀 더 잘해보겠다는 과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 행하는 연습은 내 마음의 초록불을 유지하는데에 제격이였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그래서 내가 누구를 위해서 잘해보기로 마음먹느냐는 건데, 그 누구에 해당되어야 할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결국 내가 지켜내는 것이지만, 내 앞에 있는 네가 나를 더 이상 바라봐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내일 좀 더 잘해보고 싶을지가 의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한다('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저' 중에서).' 그러니까 내 자존감이 오롯이 나만의 자존감일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믿기로 해서 사랑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애정하는 그가 나를 보살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시선에 감응한 내가 그를 따뜻하게 쳐다볼 때, 우리들의 자존감은 함께 지켜질 수 있다. 자존감이란 타인들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들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약 좀 발라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하다. 

 사회가 나를 루저라고 부르며 판단 내릴 때, 그래도 내 옆에서 친구로 남아있어 주겠다는 이들이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준다면 나는 그 부름 안에서 나만의 풍부한 의미 쌓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풍부함을 그들이 보고 듣고 느껴줄 때 나는 좀 더 풍부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 옆에 친구라는 방패막으로 남아있어 줄 것이다. 내가 내 친구들의 다양성을 바라봐줄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 각자가 내게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지 표현해줄 때,  A와 B와 C도 자신들이 못난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의심을 품을 수 있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이 두터운 인식의 한계를 깨트릴 수 있을 때까지 네가 참 예쁘다는 말을 내 친구들에게 끈질기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애정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홀로 우뚝 솟은 자존감 따위는 필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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