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 Nov 09. 2020

아름답고 싶은 욕망

김원영의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아름다움에 시달려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꼴보기 싫었다.  충분히 높지 않고 얼굴이 너무 대대했으며 몸은 비대하고야 말았다. 결핍은 노력을 자아냈다. 아름답지 못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기로 했다. 내 기억 속의 나는 초등학생 5학년 때부터 BB크림을 바르고 다녔고 주기적으로 미용실에 가서 매직 스트레이트를 주문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이모한테서 얻어온 명품 향수를 온 몸에 두르고 다녔고 돈만 생기면 주말에 입을 옷을 샀다. 여자는 그런 식으로 아름답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나를 좋아하는 남자 애들이 생겼을 때 그들의 눈이 어딘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미적 감각을 의심하며 나같은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을 싫어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는 감히 그에게 고백할 수 없었다. 내 자신이 그 애 눈에 차기에 충분히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몰래 좋아해오던 사람이 내 몸을 건드렸던 날을 기억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달콤한 감촉이였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의 역할이란 나를 가장 높은 곳에 데려다 놨다가 금세 가장 아래로 떨어트다. 언젠가 그가 내 엉덩이에 올라타며 코끼리 엉덩이 같다고 말했을 때 나는 내 엉덩이가 사라졌으면, 아니 아예 다른 몸을 가졌어야 했던 거라며 내 몸을 저주했다(지금와서 생각해보니까 코끼리들에게 미안해진다. 그들의 엉덩이를 욕되게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나의 애씀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나는 아름답고 싶은 내 욕망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예쁜 것들만 좋아하는 세상이 잘못된 거라고, 그것에 편승하려고 하는 것은 예쁜 바보가 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한 부정이 오랫동안 나를 보호해준 건 아니였다. 아름답고 싶은 욕망에 냉담한 척 연기할 수는 있었지만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 느끼는 패배감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를 더 이상 싫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아름답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내게는 여전히 아름답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한 때는 그것이 사회로부터 요구된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주문. 내가 극복하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한계로 아름다움을 지목했다. 아름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께이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다. ....우리의 '몸'을 상대방이 열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몸을 가진 존재 그대로, 개별자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 실격 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중에서>


 김원영은 '몸뚱어리 하나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가 원했던 것도 그게 다다. 이 물질 세계에서 내 몸이 가진 이 모양이 하나의 아름다운 물질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이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인간 본성일지도 모른다. 여자와 남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늙은이와 젊은이를 모두 포괄하여 인간이라서 본능적으로 가지게 되는 욕망 말이다.

 여성의 미에서 인간의 미로 아름다움의 의미를 확장시켰을 때 나는 아름답고자 하는 내 욕망을 자연스럽게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매력이 철철 넘치고 우아하고 섹시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데, 그것은 내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한 순간만이라도 유일한 사람으로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친구가 이 책을 소개해주기 전까지 김원영이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책을 읽어가며, 그가 출현한 팟캐스트를 듣고, 그의 생김새도 알게 되었다. 그를 보고 듣고 읽 시간들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충분한 시간들은 아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사빠인 내게 그는 이미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다. '품격'과 '존엄'의 차이에 대해 그가 적확하게 정의내렸을 때 그에게 반쯤 반했고, 전략적(정신승리적) 믿음과 구별된 자기 스타일의 수용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는 넋을 잃었다. 팟캐스트에 진행자인 김하나가 김원영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한 친구의 퍼포먼스를 춤추는 것에 비유하자 김원영은 그 해석에 신이 나서 연신 감탄했다. 그가 기쁨을 숨길 줄 모르고 감탄할 때 나는 그의 감탄에 감탄했다. 그것이 인간적으로 사랑스럽게 들렸기 때문이다.


 김원영이 자신의 장애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에는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을 스스로 취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그가 써내려가는 고유한 이야기를 들어와줬던 주변 사람들, 의 초상화를 오랜 시간 동안 그려와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것 같다.


 한 사람이 다시금 뭘 잘해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다른 한 사람의 작은 인정 하나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 또한 오직 한 사람의 초상화적인 시선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나를 아름답게 그려줄 때 그에 감응한 나는 수축되는 대신에 우아하게 걸어보고 싶어진다.  


 두 사람이 사랑에(혹은 우정에) 빠지고, 서로를 애정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고 반응하면서 존엄이 '구성된다'고 했을 때, 이후로 상대의 아름다움을 통합적으로 겹겹이 쌓아 그리는 초상화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일이 계속때, 그들의 존엄은 쉬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연인을 대할 때 뿐만 아니라 친구를 대할 때에도, 자주 만나는 바리스타를 대할 때에도, 다른 인종을 대할 때에도, 다른 신체 모양을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다른 동물들을 대할 때에도 해당되어야 하는 이야기가 책 속에 쓰여 있었다.


 친구는 이 책을 장애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실격 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다고 말했다. 내가 그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스로를 신체적으로 실격시켜왔고, 경제적 및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도 실격 당해본 경험이 있다. 그와 연골무형성증이라는 수평적 정체성을 공유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로부터 실격 당한 한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자리에 서서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곱씹고 싶다. 그리하여 나도 내 고유한 정체성에 대한 결단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브래지어와 페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