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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Nov 07. 2020

 브래지어와 페호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엄마는 내가 작은 가슴을 가졌기 때문에 남자들이 싫어할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주곤 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브래지어를 사입혔던 걸까. 내 가슴 둘레에 맞는 브래지어를 입으면 꼭 주먹 하나가 가슴과 브래지어의 틈 사이에 들어갔다. 작은 가슴에 젖꼭지도 작아서 도대체 내가 왜 브래지어를 입어야 하는지 의문이였다. 

 

 사기야. 네 가슴이 이렇게 작을 줄 몰랐어. 처음으로 남자친구랑 같이 잔 날, 실체를 확인한 그가 말했다. 그 때 처음으로 브래지어의 용도를 알았다. 작은 가슴도 풍만하게 보이게 하는 시각적 착시 효과.

 작은 가슴 때문에 작아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나도 훨씬 더 큰 거시기를 기대했다고 응수했다. 그는 헛웃음을 짓더니 이만하면 괜찮은 사이즈라고 말했다. 흥, 내 성엔 안 차. 

 그쯤에서 우리 둘은 눈치 빠르게 화해했다.


 브래지어를 사 입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그것을 채울 수 없는 내 가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벗고 나서야 안 입고 사는 게 너무 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은 더 이상 시각적 착시 효과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어떻게 생각하니? 네가 만약 페호를 입어야 한다면? 

남자 친구에게 페호(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남성들이 입는 속옷)에 대해서 소개해줬다. 

-왜? 내가 그걸 왜 입어?  

-그럼 나는 왜 브래지어를 차야 했을까? 

-그러게.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가 이유를 만들어주면 너도 페호를 입겠니? 

그는 재빨리 거실에서 사라졌다.


  브래지어를 왜 챠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정도가 내 한계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브래지어에는 교묘한 정치적 역학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가부장 사회의 여성이 자발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낙인의 상징 같다. 너의 신체를 두툼하고 예쁘게 가리거라. 그런 걸 이십 년 이상 차고 다니면서 너무 늦게 '내가 그걸 왜 입냐'고 되물은 것 같아 억울하다. 페호가 뭔지 듣자마자 남자친구는 1초 만에 버럭 화를 냈는데 말이다. 

 내가 브래지어를 찰 때, 왜 남성들은 페호를 입지 않아도 괜찮아 왔는지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길 줄 몰랐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계급적 구별이 너무나 확고하게 내 몸과 정신에 박혀 있어서 전복적인 상상을 하는 일이 불가능해왔던 것 같다.


 성적 지위가 급진적으로 바뀌어져 있는 '이갈리아'라는 사회는 역지사지적인 시각을 가능하게 한다. 입장을 바꿔 놓으니 분노가 일었다. 페호 없는 네 고추가 너무 자유로울 때 브래지어를 찬 나는 땀띠에 시달렸다. 네가 입을 페호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것조차 해보지 못했던 세상에서, 나는 호크가 성가시게 간지럽고 어깨가 결려와도 브래지어를 차야 했다.   


 거실로 되돌아온 남자친구가 책이 재밌냐고 물었다. 

-네가 읽으면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리말의 남성중심성을 깨뜨리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려고 할 때는 훨씬 더 급진적인 상상력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옮긴이의 말까지 다 읽었을 때였다. '극단적'이라는 내 소갯말이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보수적인) 네가 읽기에는 너무 급진적이랄까.  


 책은 극단적인 여성 중심의 서사가 아니라 급진적인 상상력으로 구현된 역지사지의 서사다. 이갈리아라는 급진적인 상상력의 세계가 그려지지 않았다면 나는 듣도 보도 못한 페호를 상상해볼 줄 몰랐을 것이다. 어떤 세계(가부장적인 세계)는 급진적인 상상력 없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상의를 벗은 남성이 축구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는 건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가리지 않도록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정신 질환이 없는 여성인 내가 상의탈의를 하고 달린다면(짜릿하다), 그것은 분명 많은 논쟁을 낳을 것이다. 

 이갈리아에서는 움들의(여성들의) 상의탈의가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맨움들이(남성들이) 예쁘고 불편한 치마를 입고 다리 모으기 예의범절을 차려야할 때 내가 젓가슴을 자랑스레 휘날리며 달리는 상상을 해봤다. 세계를 갈아타고 싶은 심정이였다. 

 이갈리아라는 급진적인 상상력의 세계는 우리 일상에서 진리처럼 굳어버린 가부장의 잔재들에 플래쉬를 비췄다. 그것의 어처구니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치졸한 성차별들에 더 열심히 반박할 수 있는 힘을 줬다. 

 

  Shero들이 계속해서 늘어났으면 좋겠다. Shero는 작살에 꽂힌 채 죽어가는 물고기의 아픔에 공감한다. 그것이 잔인한 일임을 안다. Shero는 원치 않는 페호를 벗어 던지고 그것을 불태울 수 있다. Shero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리는 명령에 불복할 수 있다. 그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할 수 있다. Shero는 연약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에 엿을 먹이고 울퉁불퉁한 근육도 가질 수 있다. 강한 신체를 위해서 스스로를 단련해갈 뿐만 아니라 강해지는 데에 벽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Shero는 신체적인 힘이 절대적인 우월함이라고 믿는 그들의 착각을 비웃을 수 있는 정신적인 강인함도 훈련할 수 있다. Shero는 어느 한 쪽이 이기는 게임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느 한 쪽이라도 덜 억울하기 위하여 평등을 지향한다.  

 

 내가 힘을 얻었다면 남자친구 영학이는 이 책을 읽고 뭘 얻을 수 있을까. 그는 곧 시험이 있다는 핑계로 내 책 추천을 교묘히 피해왔는데 과연 시험이 끝났을 때는 책을 한 번 들춰라도 볼까. 페호라는 존재에 이미 맘이 상했을 텐데. 만약 그가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끝까지 다 읽을까. 기분이 나빠서 도중 하차하지는 않을까. 

 영학이가 이갈리아의 딸들을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영학이와 같은 남성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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