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나이 듦에 대한 두 상반된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홀로 사막을 항해하는 나. 사막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때때로 모래 바람이 불어올 만큼 거칠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두 발이 모래알 사이로 푹푹 꺼지지만 나는 용감하고 자유롭게 걸어 나간다.
아직은 젊어서 무릎이 아픈 게 뭔지 모를 때나 가능한 순진한 상상이라는 걸 인정한다. 늙음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들고 늙은 나는 최대한 고생스러움을 피해 안락함을 사고 싶을 것이다.
다른 이미지 속 나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다. 그와 손을 잡고 조용한 흙길을 걷고 있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눌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본다. 여자는 권력자를 심하게 욕하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더니 꽃이 아름답다고 남자에게 말한다. 남자는 귀가 먹었는지 한 참 뜸을 들이다가 여자의 보채는 목소리에 아름답다 는 대답을 사긋하게 한다.
그는 누굴까?
나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고 우리는 8년째 동거 중이다. 그렇다면 내가 마주할 노후는 아무래도 후자일 확률이 클까. 아직은 '결혼'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않았으므로 전자의 탐험가가 될 가능성이 더 클까. 할아버지는 과연 내 옆에 이 남자일까.
알 수 없다. 날이 더워지는 와중에 좁은 원룸에서 온종일 똑같은 사람과 몇 달을 내리 살아보니 알 수 없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탐험가 쪽을 택하고 싶다. 그래,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러던 중에 그가 며칠 집을 비우겠다고 말했다. 바라던 바다. 나는 그에게 부디 일주일쯤 푹 쉬다 오라고 말했다.
일주일은 너무 느리게 흘렀고,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때 나는 그를 얼싸안았다. 그의 티셔츠에서 나는 쉰내도 모른 척할 수 있을 만큼 그가 반가웠다. 네가 없으니까 못 살겠다는 투정 어린 말까지 내뱉고 나서야 스스로를 자제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 혼자가 되는 것과 둘이 되는 것 사이에서 내가 정말로 기대하는 삶은 어떤 모양인가. 나는 오래도록 이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거나 결혼을 하거나. 씩씩한 개인이 되는 것과 다른 사람과 내 삶을 나눠가지는 것이 서로 상보적일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나는 동거를 주장할 것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를 제일의 가치로 삼는 동거를 주장할 테다. 짬뽕과 짜장면을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소비자들을 위해 짬짜면이 상품화된 것처럼 혼자와 함께를 동시에 누리고 싶은 나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자유가 전제한' 동거는 꽤 괜찮은 옵션이다. 문제는 따로 있다. 태초부터 '자유'가 부재한 교육 환경에서 자라난 인간 두 명이 만났을 때 무엇이 자유인지 제대로 정의 내리는 일이 꽤 어렵다는 사실과 네 자유가 내 자유를 침범했다고 막무가내로 싸우는 일이 빈번하다는 현실에 부딪힌다. 그의 날고 싶음을 응원해주는 것보다 사랑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그의 앞을 흐리고 욕망을 무화시키는 것이 소유욕 강한 인간들에겐 더 유혹적이다. 공장식 교육을 받은 우리 두 사람은 언제나 그래 왔던 대로 별다른 의문 없이 정해진 절차를 따라 결혼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는 정말 답이 없을까. 결혼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도착지라고 믿으면서?
지금까지의 기록들은 실패의 기록들이였다. 그를 사랑하는 동안의 개인적인 실패들을 옹졸하게 글로 남겼다. 동거가 실패하여 결혼을 할지, 동거가 실패하여 이 관계가 쫑날지 누구도 모른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사람들은 우리 둘 뿐이고 50퍼센트의 지분율을 갖고 있는 나는 아직까지 이 투자가 승산이 있다고 믿고 싶다. 아직까지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님에게 이 기록들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