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 Jun 17. 2021

편하게 섹스해요

  연인과 함께하는 동거의 가장 좋은 점은 우리가 하고 싶을 때 우리 집에서 편하게 섹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한 남자랑만 섹스를 해왔다는 자각에 때때로 숨막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내게는 동거가 선사하는 섹스의 즐거움이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고 만져볼 수 있음과 그와 다양한 액션을 취해볼 수 있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라서 생각을 교환하는 대화만큼이나 몸으로 하는 대화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이 자유로울 때 머릿 속에 편견도 덜 끼여든다. 

 사회 생활을 위하여 입어야 하는 의복과 정신적인 갑옷 따위가 거추장스럽고 피곤할 때 그와 알몸으로 마주하는 일은 해방이다. 발가벗은 그가 맨몸인 나를 들여다보면서 웃어줄 때 나는 내가 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벗고 그 앞에 서고 싶다. 내 자신과 불화를 겪고 있을 때마저 그가 내 몸을 그의 온 몸으로 받아주면 다시 차분해진 마음으로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혼자로는 부족한 인간이라서 다른 인간이 열렬히 필요할 때가 모두에게 있지 않나.

 나는 '성의 해방'을 성의 즐거움으로 이해한다. 내게 섹스는 보드랍고 몰랑몰랑하고 간질간질하고 짜릿한 기쁨이다. 섹스를 좋아해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해서 죄스러울 수는 없다.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유를 느끼면서 교감할 수 있는 가장 재밌는 놀이다. 이런 즐거움을 위하여 동거를 택했다. 그가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연인이 아니였다면, 내가 녹아들 수 있는 애무를 그가 선사하지 않았더라면 무엇하러 같이 살까. 최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가족실태조사(2020년)에 따르면, 20대의 절반 가까이(46.6%)가 비혼동거에 동의하고 절반 이상이(53%) 비혼 독신에 동의한다고 한다. 그를 만지고 빠는 일의 즐거움이 아니였다면 물론 나도 비혼 독신에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와 막 동거를 시작하고, 엄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같이 사는 중이라고 말했을 때 전화기 너머에서 그녀는 울부짖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들고 다니겠다고, 다른 친적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냐며 잔말말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내가 별 반응 안 보이자 엄마는 쌍욕을 내뱉었다. 귓구멍이 따가워져 전화를 끊어내야 했다. 일주일 동안 엄마 전화를 씹었다. 엄마는 결국 쌍욕에 대해 사과해야 했고, 전투에서 이긴 사람은 나였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부모님댁에 돌아가지 않았고 이제 엄마는 내 동거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내 거취를 묻는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걔 남자친구랑 동거하러 집나갔다고, 자기 딸을 먼저 비웃고 마는 대범한 엄마가 되었다. 엄마도 구식을 이겼다.

 아빠 앞에서 처음으로 동거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는 기선 제압에 나선 장군처럼 굴었다. 단호하고 빤빤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남자친구랑 같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맸다. 그가 멍한 틈을 타 나는 확실한 의사를 전했다. 결혼 생각은 없고 동거는 계속할 거라고. 아빠가 담뱃갑을 집어들길래 내게 던질 줄 알았는데 현관문을 나섰다. 소리치고 막말을 내뱉는, 자고로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평소 아버지상과는 다른 모습이였다. 아빠는 그 날 자기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딸의 성장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거라고 생각한다. 내 독립을 소화해내기 위해서 그에게는 담배 한 개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집을 나가고,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고, 남자와 동거한다는 사실까지 전해듣고 나서야 엄마 아빠는 내가 더 이상 그들의 작고 귀여운 아기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했다. 


 남자친구는 다른 이유로 시달린다. 그의 지인들은 그쯤 만났으면 나와 결혼해주는 게 예의라고 남자친구에게 조언한다. 남자친구는(남자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여자는) 괜찮지 않을 거라면서.

 괜찮지 않다니, 무슨 소릴까?

'동거한 여자, 그것도 한 남자랑 8년 동거한 여자를 그 남자 아니면 누가 데려가겠나.'

 이런 종류의 끈적한 편견이 그런 오지랖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내가 없는 자리에서 오간 말이니 어쩔 수 없지만 혹시 그들이 전해들을 수도 있으니 한마디 하자면, 나는 괜찮고 나는 아무도 나를 데려가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내가 누구랑 살고 싶은지 잘 알고 그와 잘 살고 싶을 뿐이다. 그보다 더 알지 못하고, 내 삶에 대해서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자친구가 좋아서 만났고 좋을 때까지 그와 함께 살 생각이지만 나를 책임져줬으면 해서 그에게 내 존재를 내맡긴 적은 없다. 오래 만났으니 결혼하는 게 예의라는 구린 생각이 싫고, 예의를 한아름 안고 식장에 들어가 참을 수 없는 결혼 생활을 참아내는 인내는 상상하기도 싫다. 

 

 결혼을 하든 말든, 여자든 남자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자유롭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경제적/문화적 토대가 마련된다면 세상이 지금처럼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로맨티스트인가. 사랑에 빠진 인간들이 사회에 악이 될 확률은 증오에 찬 인간들의 그것보다 현저하게 낮을 것이다. 삐뚤어진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나의 경우는 동거라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통해서 사랑을 주고 받는 게 어떤 것인지 배웠다. 그것은 (다른 모든 가족 형태와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않지만, 나는 내가 하는 사랑과 사랑의 공간인 동거 생활에서 주체성을 가지는 일과 책임지는 일을 함께 해왔다.


 동거를 두고 남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여자들에게 낙인을 찍는 문화는 성 앞에서 한쪽이 주체성을 독점할 때 다른 한 쪽은 자유롭지 못한 수동성을 학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강화한다. 관습적인 눈을 단 늙은 정신을 가진 어떤 사람이 섹스가 너무 좋아서 동거한다는 내 얘기에 손가락질을 하려고 들 때, 그에게 부디 구린 생각은 거울을 쳐다보고 마주할 자신에게 펼치라고 대꾸하는 연습을 이어할 필요가 있다. 성적 자유는 동거하는 여자를 낙인찍는 가장 강력한 이유지만, 내가 당당하게 내 자유를 쟁취하고 맛있게 먹어내고 자랑질을 하다보면, 또 나처럼 밝히는 여자들이 더 많이 생겨나면, 아는가? 언젠가 결혼 이전에 동거가 정상값이 될지. 

 

 로맨티스트일 뿐만 아니라 실용주의자로서도 동거를 옹호한다. 여자든 남자든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자유롭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뉴스에서 매번 높아지는 이혼율을 두고 떠들 일도 없을 거라는 비약을 해본다. 뭐든 한 번만에 성공하는 것은 힘든 법인데, 딱 한 사람과 딱 한 번 결혼해서 평생을 불화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의심스런 신화지 않을까. 

 내가 한 남자랑만 이렇게 오래도록 섹스하는 게 가능할 줄 몰랐다. 내게는 몇 명과 섹스하냐는 양적 문제보다 어떤 섹스를 하냐는 질적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동거를 해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발견이다. 나는 나처럼 양보다는 질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동거를 권하고 싶다.

 차라리 결혼을 하라고?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걸어들어갈 생각이 아직 없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이 좀 있다. 이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꾹꾹 참아내며 살아온 여자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친사회적인 것을 비논리적으로 싫어하는 개인적인 경향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싫은 걸 억지로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와는 다른 이유로 결혼이 너무 하고 싶은 사람들이 서로 좋아서 하는 결혼은 언제나 축복해주고 싶고, 그들에게 혼전 동거도 결혼 연습용으로 제격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이 사람과 몸을 섞는 게 좋은지, 앞으로도 계속 섞고 싶을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거는 연애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생활 알맹이들을 하나하나씩 들여다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마저도 수용 가능하다면 결혼을 해서도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돈에 빠지는 대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기 알맞은 짝을 고르는 계산력 대신 내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을 알아차리는 감각력이 우세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다 나처럼 인생 망하는 인간들이 늘어나면 어떡하냐고 누가 걱정하면, 어차피 망할 걸 좀 더 자유롭게 망하는 게 낫지 않냐고 웃고 말겠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내게 가능한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개인은 섹스에서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다양한 오르가즘을 폭넓게 느낀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눈길과 인정을 받는 달콤함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오르가즘 쪽이 훨씬 더 내 취향이다.

 


* 덧붙이는 말

 남자친구와의 섹스에 만족하기만 하는 것처럼 말한 것 같아 불만 하나를 남기기로 했다.

 내 남자친구는 야동으로 성을 배웠고 아직도 야동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인데, 내가 재밌는 섹스 놀이를 제안하거나 섹스 토이샾에 가자고 하는 일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굳이?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굳이 야동을 보면서 다른 건 부끄러운 걸까? 

 그가 너무 늙어버려서 귀찮은 마음에 일정한 섹스 패턴만 고집하고 새로움을 더하고 싶은 내 취향을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섹스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부디 그가 앞으로도 내 오르가즘을 북돋아주는데 망설임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열심히 움직일 테니까.

이전 09화 여자는 서른에 끝나고 남자는 서른에도 포르노를 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