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서른에 끝나고 남자는 서른에도 포르노를 본다
입생 로랑과 나는 대학 동기였고 한 시절 수업을 빼먹고 거리를 배회하는 일을 함께 했었다. 내가 자퇴를 하고 이십 대를 한국 아닌 곳에서 굴러 먹는 동안 그녀는 졸업을 하고 교직원 사회의 선생님으로 살아남았다.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속한 사회 속에서 다른 때를 묻히고 쌓아서 같은 날에 서른이 됐다(로랑이와 나는 생일이 같다). 스무 살 로랑이의 풋풋한 앞머리와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자매애에 대한 감각이 이젠 멀고 먼 얘기 같다.
앞머리가 없는 서른 살 로랑이는 말한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정말 남자들한테 먹히기 힘들어.' 로랑이를 만날 때마다 놀라는 지점은 이런 순간들이다. 우린 꾸준히 안 먹혀 왔다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말해 뭐해. 서른 로랑이를 만날 때면 두터워지는 뱃살에 대한 한풀이와 미간에 맞은 필러의 우수함에 대해 먼저 수다를 떨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남자 친구 얘기, 또 그다음에는 결혼 얘기. 결혼 말고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로랑이에게 스무 살 적 그 애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하고 싶은 것 천지였던 스물 로랑이 했던 말들은 내 머릿속에만 맴돌 뿐 어디 녹음해둔 데가 없어서 아쉽다.
남자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 로랑이 소식을 전해줬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남자한테 먹히기 힘들어서 서글퍼하는 중이라고. 밥알을 야무지게 씹으며 되새김질하는데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여자 서른이면 끝났죠.' 다름 아닌 내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이 남자가 했던 말 아니던가.
그와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인 커플과의 술자리였다. 그들은 연상녀-연하남 커플이었고 우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서 곧 서른을 맞이할 연상녀를 두고 남자 친구가 농담처럼 저 말을 했다. 연상녀도 소주를 들이키며 웃고 넘겼는데, 나는 화가 나서 그렇게 밖에 생각할 줄 모르냐고 남자 친구를 할퀴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내게도 서른이 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미리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이 사람, 서른이 되면 나랑도 끝낼 놈이구나 싶었다.
나는 서른이 되었고 그의 발언에 따르면 '끝났고', 그는 끝난 여자랑 아직까지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다. 벌을 받은 것이다. 끝난 여자랑 살을 맞부딪치고 잠자리에 드는 기분이 어떠냐고 그에게 묻고 싶어 졌다.
김치찌개를 후루룩 마시는 그에게 기억나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는 표정을 짓는다. 김치 씹을 시간은 주고 어디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려보자. 계속 부정하는 일은 신경질적인 여자의 끈질긴 분노만 가중시킬 거란 사실을 깨달았던지 그가 입을 떼고 말했다.
'예전 일을 생각하면 내가 참 어렸구나 싶네. 철이 없었지.'
'그래? 나도 어리고 철은 너보다도 없었는데, 나는 왜 그게 잘못된 발언인 걸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러네. 내가 참 못났었다.'
오랫동안 같이 살다 보면 언제 꼬리를 내려야 하는지 직감할 수 있고 그는 그 직감력에 나보다 뛰어나지만, 나는 그의 성급한 자기 비하가 마음에 안 든다. 일초라도 빨리 화제를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태도가 거슬린다. 가만히 놓아둘 순 없지.
'너만 못난 건 아니야. 너처럼 못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으니까 자책하지 마. 사회가 굳게 믿고 있는 믿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너와 네 친구들처럼 집단적으로 소비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 네가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여자는 서른이면 끝이라고 발언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믿음을 함께 지지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넘쳐났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와는 달리 나는 언제 멈춰야 할지를 모른다. 태클을 그만두고 맛있게 식사를 해도 좋았을 걸 몇 마디 더 내뱉어서 식사의 끝 맛을 해친다. 분노가 많아서 그런 건지, 혹은 스스로 전사의 이미지를 과도하게 부여한 탓인지 여하튼 그렇다.
'이제 그렇게 생각 안 해.'
서른 이후에도 여성들의 삶이 끝났다고 더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내 남자 친구는 야동을 좋아한다.
남자 친구는 아다인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발언이 당당하게 내뱉을 것이 아니라 무식함의 징표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고, 여자 친구 엉덩이를 두고 코끼리 엉덩이라거나 가슴이 절벽이라고 비웃는 게 상대방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음도 (한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런 내 남자 친구의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은 야동이다.(이 글이 남자 친구에 대한 폭로전이 아님을 밝힌다. 있었던 객관적 사실을 본인 허락을 받고 주관적으로 기술할 뿐이고 현재 그와 나의 사이도 무탈한 지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함께 밝힌다.)
그는 시험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자기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면 야동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참으로 다양한데 허구한 날 야동으로밖에는 마음의 안식을 얻을 게 없는 그가 안쓰러우나 한편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스크린 세상 속 빵빵한 D컵 가슴과 탱탱한 애플힙을 가진 여자들을 시각적으로나마 소비할 수 있는 알량한 권력이 자기 성기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내가 화가 나면 초콜릿을 찾는 것처럼 기분이 울적할 때 찾는 간식 같은 것일까. 아니면 아주 어릴 적부터 쌓아온 습관 같은 것일까.
세상에 야동 안 볼 남자는 없다고 남자 친구가 말했다. 아무렴. 야동 안 보는 남자를 찾아 삼만리를 나서고 싶은 생각도 없고, 야동의 좋고 나쁨에 대하여 콧대 높여 토론할 생각도 없다. 단지 내가 뻔한 남자랑 너무 오래 만난 건 아닌가 싶은 회의감이 김치찌개 앞에서 찾아왔다. 여자는 서른이면 끝난다고 생각하며 본인은 서른이 넘어서 끝나기는커녕 야동을 폭주하는 남자. 그의 야동 봄에 비견할 만한 나의 성적 유희는 어디에 있나 생각해보는데 내겐 딜도 하나 없다는 사실에 풀이 죽었다.
내 한계는 내가 그의 윤리 선생님이 아니라는 이성에도 불구하고 야동을 소비하는 그의 자유가 탐탁지 않게 여겨진다는 데에 있다. 30년 넘게 포르노 산업을 연구해온 거장, 게일 다인스는 그의 책 <포르노 랜드>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야동의 세계에서 여성들은 구멍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일차원적인 존재이며, 남성들은 영혼도, 감정도, 도덕관념도 없이 발기한 음경만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 유지 체계로,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여자를 이용할 권리 있는 존재로 전시된다.'
세상에 야동 안 볼 남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게일 다인스의 말에 고개가 더 끄덕여진다.
포르노 산업은 본래 남성들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여전히 남성들이 주요 소비자들이다. 우리 서른이 넘어서 끝나버린 여자들이나 아직 서른 선을 넘지 않은 여자들도 합세하여 포르노를 아무리 감상해봤자 성차가 3대 1이다.* 누가누가 포르노를 많이 보나 경쟁하자는 건 아니고, 같은 성적 동물로서 이렇게 욕망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이상하다. 나만 봐도 몸 좋은 남자가 잠깐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숨이 멎고 그 정도가 전혀 내 남자 친구의 글래머러스에 대한 흥분에 뒤지지 않는데 말이다.
남성들의 성적 본능은 유전자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반면, 내가 난잡한 말 몇 마디를 하면 밝히는 여자라고 욕을 먹는다. 시선의 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끈적한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성적 본능이라서 시도 때도 없이 발기할 수 있는 횡포를 자유라고 믿을 수 있는 그들의 권력을 포용적으로 허용해주는 문화의 힘이 크다. 편향된 성적 권력은 남성들의 욕망을 삐뚤 하게 유인하고 부추겨오는 기제다. 그러나 그것은 진화 심리학에 의해 널리 퍼뜨려진 신화일 뿐이고 현대의 많은 성과학자들은 성욕이 유전자의 산물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성적인 사람, 즉 어떤 사람이 성욕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하나의 자유를 의미하며 그러한 자유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것이다."** 테리 피셔(오하이오 주립대 심리학자)가 한 말이고, 더 동의하기 어렵다.
사회에서 권력을 잡은 쪽은 그들이 믿는 이야기를 퍼뜨릴 수 있는 힘도 얻는다. 남성들은 강력한 사회적 권력을 가져왔고 그 권력은 그들의 자유로운 성욕이 충분히 허용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왔다. 가부장적 배경에서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를 음미하며 소비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러고 싶다. 인간의 성욕에 관해서 아직까지 더 밝혀져야 할 것이 많은 와중에 그것이 유전자의 산물인지 사회적 규범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나는 문화가 추동하는 성적 허용(남성)과 불용(여성)에 대해서 오래 곱씹게 된다. 남성의 욕망은 분출 가능할 때, 여성들은 단지 그들의 욕망에 반응하거나 부응하도록 길들여진 불편한 성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야동을 보면서 자위하는 여성들보다 늘어나는 주름살과 나이를 걱정하는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에서, 내 친구 로랑이가 내게 그러듯 여자이기를 방심하지 말라는 주의가 매스컴에서 넘쳐난다. 서른이야 서른! 여기 안티에이징 크림과 보톡스와 콜라겐!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사랑하는 이유는 여성이기에 감각할 수 있는 사회성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사회적 시선의 성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지 내 자신을 여성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상자 안에 가둬놓고 그 안에서 성적으로 의존적이고 제한된 의미만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외모를 걱정할 시간에 나도 차라리 발가벗고 발기한 남성들이 전시되어 있는 잡지나 보면서 자위 기술을 연마하고 싶을 따름이다.
성을 허용받은 자들은 그것을 향유하고 도를 넘어 소비하고 어느새 폭력을 행할 수도 있는 어른으로 자란다(N번방 사건). 허용받지 못한 여자들은 그들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에 서른이 되는 게 무섭다.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게 될 때 나란 존재를 어디서 구원해야 할지 길을 잃는다.
구원받기에는 죄악이 많은 인간이라 길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요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눈치채는 일을 그만두고 누구보다 내 욕망을 알아차리는 일에 집중한다. 예를 들면, 내 성적 취향은 태닝한 근육질의 동양인 남자인데 그가 베이스톤의 목소리를 가졌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런 남자랑은 두세 번쯤 섹스를 하고 싶다. 근데 이 남자가 몸만 예쁘고 마음이 안 섹시하면 네 번째 섹스가 불가능하다. 이 남자가 그저 습관화된 성기적인 뇌밖에는 가진 게 없다면 나는 그 앞에서 나 자신을 치장하거나 발가벗는 일을 오래 하고 싶지 않다. 겉이 매끈한데 속이 흥미롭지 않으면 금방 애정을 잃는 법. 단, 리키 저베이스 정도로 섹시하면 태닝도 근육질도 동양인도 필요 없고.
서른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랑은 서른에 끝내면 된다. 서른의 맛을 존중해주는 남자랑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그런 남자는 없을 거라고 함부로 생각 말고, 그전에 서른이 끝이라고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구차함도 부리지 말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게 좋겠다. 스물이든 마흔이든 쉰이든, 삶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인 채로 이야기를 끝까지 지어나가려는 인간들은 결국 다 멋있고 만다.
여자 나이 서른이 끝이라고 그래도 주장하고 싶다면 남자 나이 서른도 끝이어야 한다. 그들의 도착적인 여성 소비 심리도 끝나고 부디 몸만 어른이지 말고 생각하는 뇌를 키우는 연습도 했으면 좋겠다.
*미국 포르노 사이트 엑스햄스터의 보고서(2017)에 따르면 포르노를 보는 여성들이 급격하게 늘어가는 와중에도 2016년의 남성과 여성 시청자 비율은 74대 26으로 크게 차이가 난다. 한국의 경우 같은 해 전체 시청자 수는 334% 증가했는데, 남성 시청자 수의 급증으로 여성 시청자의 절대적인 수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비율은 줄었다.
** 책 <욕망하는 여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