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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18. 2021

사랑한다면 봉사를.

 그와 동거를 하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는 내가 만들어내는 먼지들을 걷어가는 사람, 쓸고 닦으며 다시 말끔한 생활을 제공해주는 사람, 때가 되면 일용할 양식까지 베풀어주는 사람이었다. 집을 떠남은 엄마 우렁각시를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했다. 엄마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삶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치워줬는지 전엔 알지 못했다.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널고 개고, 방을 쓸고 닦고, 다달이 월세를 내고 각종 청구서를 처리하는 게 몇 달 동안은 괜찮았다. 귀찮았지만 할 만했다. 그러다 내 동거인이 자기 차례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눈치껏 빨래를 안 돌려놓거나,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는데 장을 보러 가는 일이 너무 귀찮거나, 뜬금없이 화장실 변기가 막혀버리는 일 따위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였다. 몸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지만 뚜렷한 성취물을 남기지도 않고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닌 생활 잡일을 하면서 이것들이 언제나 되풀이될 것이고 나 대신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자각되면, 한숨과 함께 쥐고 있던 걸레를 내던지고 싶다. 우리 엄마는 이 일들을 어떻게 혼자서 다 해치웠나 싶다. 내 경우에는 두 사람 몫의 집안일을 파트너와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것이지만, 엄마는 내가 자라나는 동안 줄곧 임금 노동+세 사람 몫의 가사 노동을 홀로 해냈다. 나는 예쁜 딸이라는 배지를 달고 아빠는 가부장이라는 권위로 엄마를 부려먹었다.


  엄마가 알면 마음 아파할 사실이지만 나는 호주에서 경기장 변기 담당 청소부로 3개월가량 일하다가 오른쪽 사지에 마비가 온 덕에 일을 그만둔 경력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청소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취업 비자 없이 간 캐나다에서 다시 가정집 청소로 현금을 벌어먹어야 했다.

 내가 변기를 닦을 동안 대형 청소기를 짊어지고 일했던 남자 친구의 기억에 따르면 내 청소 솜씨는 형편없었다고 한다. 아무렴 손에 물방울 하나 묻히지 않고 키운 고운 딸이었는데 변기를 뭐 얼마나 잘 닦을 수 있었겠나. 뭐든 하다 보면 는다고 캐나다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첫날부터 손이 야무지다는 칭찬을 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해서 나는 고래처럼 어푸어푸 이 집 저 집을 쓸고 닦았다.


 청소를 하면서 내게서 엄마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았다. 집안일을 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 엄마 참 어구시다('억세다'의 방언)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녀 몸이 매우 급하고 거칠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녀 몸의 리듬은 프레스토였고 느껴지는 힘의 정도는 포르티시모였다. 청소일을 할 때마다 나는 엄마의 매우 빠른 그 리듬과 매운 강한 그 세기를 내 몸에서 느꼈다. 아무래도 나는 엄마로부터 재빠르고 강력한 일처리 능력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에너지와 청소일의 경험들이 더해져서 이제 집안일에 꽤 능숙한 사람이 됐다. 냉장고의 야채들이 썩기 전에 그것들을 활용해서 요리해낼 줄 알고, 생활이 너무 어지럽혀지기 전에 청소를 하고, 도와주는 이 없어도 무거운 가구들을 이리저리 재배치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모든 딸들처럼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배신을 다짐한다. 엄마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를 위해 땀 흘리고 싶지 않다.

 내가 만난 남자는 엄마의 남자처럼 최악은 아니지만, 가부장제가 길러낸 어느 남자도 가사 노동을 앞에 두고는 최악이 될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을 명심한다. 나는 집안일을 앞에 두고 힘을 빼려고 애쓴다. 내가 너무 잘해버리면 남자 친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 유전자에는 생활의 억척스러움이 이미 새겨져 있고 그에게는 무슨 일도 담배를 먼저 피고 느긋하게 시작하는 한가로움이 장착되어 있는데, 이 다름이 성별 문화에서 길러진 것인지 개인성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우리가 막 처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진 공간은 셰어 하우스 안의 방 한 칸이 전부였다. 한 칸짜리 방에서는 몇 번 둥구는 일로도 청소가 가능하다.

 우리가 방 2개 화장실 하나의 큰 집을 셰어 하고 나서부터 집안일은 내게 굉장한 스트레스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왜 먼저 움직이지 않냐고, 네 눈 앞에 먼지가 안 보이냐고 눈을 부라렸다. 생활 동반자로서 나의 정정당당한 요구가 그의 귀에는 지겨운 잔소리로 가닿았다.

 

 아무리 요구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을 때 내가 취한 방법은 집을 비우는 것이었다. 바닥이 더러워 보여 청소기를 꺼내 들고 싶지만 이번 주말은 그의 차례라면 나는 집을 나가 카페에 갔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내 눈에 보이는 먼지들을 모른 척했다. 드디어 그가 먼지를 발견하고 그 먼지에 대해 불편하다고 느껴서 청소기를 집어 드는 날이 되면 집에 돌아왔다. 사람마다 먼지를 발견하는 시차가 존재하고 먼지에 대한 태도마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와 함께 살면서 깨달았다. 지금은 그가 먼지들을 영원히 발견하지 못하는 뻔뻔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 하나에 안도한다.


 내가 집안일 히스테리를 부릴 때마다 그는 사랑이 식어서 잔소리가 심해지는 거라고 나를 탓했다.

 제목만 보고는 절대 집어 들고 싶지 않은 책 <5가지 사랑의 언어>에 따르면, 사람마다 '제1의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고 한다. 테스트 결과 4가지 다른 언어를 압도적으로 이긴 내 제1의 사랑 언어는 '봉사'였다. 봉사가 의미하는 것은 상대를 위하여 내 몸을 움직이는 실제적인 행동이다. 그가 나를 위해서 비건 요리를 해주거나 자기 당번일 때에 딱 맞춰 화장실 청소를 빛나게 해 놓은 걸 보고 복받쳐 오르는 감동에 무장해제됐던 이유를 봉사가 내 사랑의 언어였다는 것과 연결 지으니 납득이 갔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스킨십과 같은 사랑의 언어들은 사랑 없이도 연기할 수 있는 제스처일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 밥을 짓고 공들여 반찬을 만들고, 그가 힘들 것을 대신하여 내 몸을 움직여 방바닥을 쓸고 닦고, 내가 하기 싫은 만큼 그도 하기 싫을 화장실 청소 같은 걸 미리 해치우는 가사 노동은 가장 적극적이고 물질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라면 한 두 번쯤 메쏘드 연기법으로 해낼 수도 있겠지만, 일상적인 가사 노동을 매번 제스처로 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해서 마음이 움직이는데 몸은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를 사랑하면 내 몸을 움직여서 그의 힘듦을 덜어주고 싶고 내가 조금 더 땀을 흘려도 그는 쾌적하길 바라게 된다.


 대구 부모님 댁에 내려가면 집안 곳곳에 엄마의 노동이 고스란히 보인다. 엄마는 내가 갈 때마다 딸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한상 차려낸다. 내가 설거지라도 하겠다고 일어서면 먼 길 와서 피곤하다며 나를 앉힌다. 그렇게 엄마 음식을 받아먹고 있는 게 너무 편해서 미안해진다. 동시에 나는 다 먹은 밥그릇을 식탁에 그대로 두고 떠나는 아빠의 염치없음에 치가 떨린다. 그의 뻔뻔함을 가능하게 하는 그림자가 뭘지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게 된다.

 아빠가 꼴가부장 왕좌에 앉아 텅 빈 권위를 지켜내려 애쓰는 모습이 같잖고, 더 이상 나는 예쁜 딸로 머물고 싶지 않다. 엄마가 말려도 설거지는 내가 하지만 그것 말고 그녀의 노동을 되갚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남자 친구와 동거하면서 남녀 서로에게 공평한 가사 노동이 어떤 모양이어야 좋을지 생각해보고 우리 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규칙들을 세우고 타협해가면서 생활양식들을 만들어 가는 일은 언제나 삐거덕 거렸지만, 해볼 만한 일이여 왔다. 두 사람은 많은 경우 서로에게 참을 수 없는 소음을 내질렀고 때때로 서로의 자리를 헤치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동거라는 실험실 덕분에 우리는 각자의 자유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위해서 싸우고 화해할 수 있었고, 우리들의 먼지를 처리하는 일에서도 나름의 노하우를 갖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두 사람의 공간은 아직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맞벌이 가구의 여성은 하루 평균 4시간 37분의 유급 노동과 3시간 7분의 가사 노동을 하는 한편, 남성은 5시간 50분의 유급 노동과 54분의 가사 노동을 한다. 간단한 수학 셈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내가 남편보다 하루 평균 2시간 이상을 더 노동한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공간을 나만큼 그가 잘 지켜내고 싶다면 부디 그가 내 사랑의 언어가 뭐였던가 잊지 말고, 위의 남녀 생활시간 조사(2019년 통계청) 결과를 틈틈이 상기하면서 더 크게 눈을 뜨고 집안 먼지를 발견해주길 바란다.


 (그의 가장 우세한 사랑의 언어는 '함께하는 시간'과 '스킨십'이었다. 왠지 내게 좀 더 유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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