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기 전에
지금쯤 너는 친구들과 술자리에 있겠다. 여긴 아침 일곱시고 거긴 밤 열한시.
우리가 같이 살던 7번 스트릿 14번 애비뉴의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 화장실에는 환풍기가 없어서 똥을 싸면 똥싼 냄새가 오래 머물렀잖아. 나는 네 똥냄새에 코를 싸매고 너를 놀렸고 너도 내 똥냄새에 기겁했지. 어디 똥뿐이겠어. 너는 내가 자면서 방귀를 엄청나게 뀌어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이디 똥방구뿐이겠어. 겨울만 되면 나는 코를 흘리고 다녀.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찬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코가 훌쩍 울더라. 씻지 않은 얼굴로 아침을 먹다가 내 코가 울면 너는 말했어. 코 풀고와. 나는 조금 무안해하면서 먹던 밥을 그만두고 코를 풀러 우리의 똥화장실로 가는거야. 나의 너저분함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하는 걸 허락한다면 열 가지는 더 댈 수 있겠다. 네가 큰 맘 먹고 산 퀸 사이즈 매트리스를 거무튀튀한 생리혈로 얼룩지게 만든 것도 나잖아. 그걸 보고 너는 딱 한마디 했어. 오마이갓. 근데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너한테 예쁘게 보일까를 궁리해. 말도 안 되지?
(너의 더러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할게. 인간이면 거기서 거기 정도로 다 같이 조금씩 더러우니까. 오늘 여기서는 똥도 싸고 방구도 뀌고 쿳물과 핏물까지 흘리는 내가 아직 너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해.)
어쩌면 나는 병에 걸린 건지도 몰라. 아니면 중독일까. 사랑은 빨리 끝난다고 사람들이 말하잖아. 연인 관계에서 그런 건 2년, 후하게 3년이면 끝난다고 오랜 커플들은 자조적인 농담을 내뱉어. 이후엔 다들 정으로 산다고 말이야. 습관이라고 해도 좋고. 나는 너랑 법적 가족이 아니라서 그럴까. 아직까지도 너랑 잠을 자고 싶어.
세상에는 정말 많은 맛의 아이스크림이 있고 한 가지 맛만 먹는 건 정말 바보같은 일이라고 조이(맞아, 프렌즈의 그 조이)가 말한 거 기억나? 나는 조이의 아이스크림 이론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를 생각해. 두 사람이 open relationship을 가졌잖아. 서로가 함께하는 동안 각자가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들을 탐험해보는 일을 허락했지. 어디선가 읽기를 사르트르는 세상을 떠날 때 그에겐 보부아르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아이스크림이였다고 말하고 죽었대. (물론 아이스크림은 내가 만든 비유고, 이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던 것 같아.)
내가 아이스크림 탐험을 제안했을 때 너는 단박에 거절했지. 아이스크림 탐험이 별거니? 한 여자가 한 남자랑만 잠을 자는 건 섹스에 대한 모독이야. 그건 소유고 사랑은 아니지. 한 여자가 오직 그와 섹스하는 건 복제인간이 텔리비전 드라마를 보고 인간들의 굿나잇 키스를 습득하고 따라하는 것과 같은 무수한 복사야(영화 '나를 보내지마'를 봐봐). 거지같은 남자들도 많지만 죽여주는 남자들도 얼마나 많은데,라고 말했을 때 네 표정이 어땠더라. 오늘부터 네가 죽기 전까지 잠을 잘 수 있는 여자가 딱 나 하나 뿐이여야 한다는 맹세가 숨막힌 적이 정말 없었다고? 네 성기를 좌절시킨 적이 없었다고? 사랑의 서약에 맹세를 받치고 돌아온 일상에 숨어 포르노를 보며 죽어가는 성기를 달래는 남자, 네가 정말 그런 남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세상에 너무 많은 여자들이 부동의 항구였고, 너무 많은 남자들이 배였잖아. 항구든 등대든 거기 그대로 두고 너랑 나랑 다 같이 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배 두척이 다시 만나는 곳에서 우린 얼마나 반갑겠어.
내가 말을 마쳤을 때 너는 싱거운 웃음을 한 번 지어보이고 내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넜어. 내 오른손에는 코코넛 밀크로 만든 초콜릿 퍼지 아이스크림이 쥐여있었어. 네 왼손에는 레몬 라임맛이 쥐여져 있었고. 퍼지를 한 입 베어물면서 알아차린 사실은, 나는 항상 초콜릿 퍼지를 고르는데 네가 고르는 아이스크림 맛은 매번 다르다는 거야. 나는 머릿 속에서나 죽여주는 남자를 상상하지만, 어쩌면 정말 탐험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네가 아닐까.
'테레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라는 여자를 사랑해. 테레자는 참을 수 없어서 똥을 싸니까, 그리고 테레자는 그 똥이 어디로 가는지, 세상에 이 많은 똥들이 땅 아래로 흘러 들어가고 나서도 사람들이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그 땅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밥을 먹고 깨끗하고 정상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을, 그 불협화음을 알아차리고도 도망치지 않았거든. 세상은 똥통이고 지구는 나와 소와 돼지들의 방구로 오염되는 중이고 인간들은 코흘리개들이야. 단지 우리는 깨끗한 도로를 펴내서 똥통들을 파묻고 공기청정기를 돌리고 향수를 칙칙 뿌리고 매일 아침 새옷으로 갈아입으며 내가 좋은 인간이라고 착각한 채 착각을 모르고 사는 거지. 너무 염세적으로 들려? 그럼 내가 테레자라는 캐릭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줘. 테레자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힘없는 것들이 아플 때 자기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잖아. 테레자는 토마시를 견딜 수가 없고 삶도 견딜 수 없을 때 똥통에 주저 앉지 않았어. 테레자는 두 발을 땅 위에 딛고 서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그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알고 나서도 죽어가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설 수 있는 사람이야. 우리 둘이 영화를 같이 봤으니까 너도 결말을 알잖아. 나는 테레자가 토마시와 함께 죽게 되는 그 순간에 미소를 지었을 거라고 상상해. 사는 게 축복이라면 테레자 같은 언니를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
가장 작고 힘없고, 그렇지만 따뜻한 빛이 나는 걸 보게 되면 그걸 잊을 수가 없는거야. 아무리 다른 많은, 맛있고 은밀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그 빛은 져버릴 수가 없는 거야. 몰라, 내가 천년 만년 산다면야 그런 빛을 열 번이나 백 번쯤 볼까. 근데 나는 오래 산다고 해봤자 몇십년 안에 죽을 거고(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해도 생명 연장을 선택하진 않을래), 앞으로 그런 빛을 보게 될 일이 두고 두고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건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촉수를 세워서 상대를 느껴야 하는 일이잖아. 이 생에서 그런 시간과 에너지가 내게 얼마나 많이 주어질까.
너를 만나면서 사랑을 경험했어. 진부한 말이지만 사실이야. 그건 너를 만나면서 네 속의 빛에 대해 느끼게 됐다는 말과 같은 말이야. 그건 영혼일까? 아니, 난 맹세보다 영혼을 믿는 게 더 싫거든. 그건 반짝 반짝 빛나는 빛이 아니고 어둠과 상반된 빛도 아니야. 나로서는 빛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무엇이야. 그걸 명명할 적절한 언어를 아직 찾지 못했어. 영화 '아바타'에서 제이크와 네이티리가 촉수로 교감할 때 나는 그들이 서로의 빛을 알아보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내 머리카락을 쥐어잡고 네 머리카락에 맞대어 봤지. 네가 뭐 이런 게 있나 싶은 얼굴로 그만하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짓을 즐겨 했을 텐데. 영화 속 교감 장면은 내 머릿 속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있어. 너와 나 사이에 생겨난 보이지 않는 투명 연결선들에 대해 자주 상상해. 사랑한다는 것은 느끼는 일이고, 서로 느끼는 일은 투명한 연결선들을 만들지. 연결된다는 것은 표면적인 세상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오직 너만이 가진 네 속의 빛을 내가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야. 그것은 또한 너의 파동을 듣는 일이야. 그걸 들여다보고 들어줄 수 있는 시간들이 그리워. 물리적으로 먼 곳에 있을 땐 아무리 강력한 연결선들도 끊어지기 마련이야.
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 사랑은 빛을 알아보는 일이지만, 또 사랑은 우리가 똥을 싸는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기도 하니까. 세상이 똥 위에서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밤하늘에는 오래 전에 죽은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거야.
너라는 빛을 사랑해.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약속도 맹세도 정절도 없어. 나는 뭐든 기름기가 적은 게 좋거든. 영원을 믿지 않는 나와 로맨스를 꿈꾸는 너는 지금은 이름도 잊은 히말라야 들판 돌무더기 뒤에서 같이 똥을 싼 적이 있어. 그건 화석이 되었을까. 다른 동물들의 먹이가 됐을까. 풀들의 비료가 되었을까.
어쩌면 내가 영원을 믿지 않는다고 떠들 수 있는 이유는 내 옆에 있는 네가 너무 돌같이 거기 있어주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쩌면 내 속마음은 네가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충신이길 원하면서 다른 여자들에 대한 욕망은 무수한 아이스크림 맛들로 대신 해소하길 소망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아직 늙어버리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에 대해서 빛이고 똥이라고 떠들어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랑에 대한 찬가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잃어버리고 너를 잃지 않기 위해서 노트 위에 '자유'라는 글자를 세 번 썼어. '자유'를 까먹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쓰고 또 다짐해야 해. 비행기를 탈 때도 이 노트를 내 백팩에 챙겨 탈거야. 백팩의 앞주머니에는 너의 증명사진들이 한가득이야. 이사를 하면서 내 증명 사진들은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서 다 버려 버렸는데 네 얼굴은 가위로 자를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그냥 버릴 수도 없어서 모아뒀어. 보통 어떤 기관에서 증명사진을 요구받을 때는 두 장이면 충분하고 6개월마다 갱신해야 하는데, 사진관들은 왜 이렇게 많은 사진들을 인쇄해주는지 모르겠어. 애인들이 그걸 다 버리지 않고 챙겨두길 기대하는 건가.
스물 여덟 시간 뒤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거고, 그로부터 열 다섯 시간 뒤에는 나도 너랑 같은 시간대에 내릴 거야. 국경이 봉쇄될지도 모른다는 허튼 상상을 하면서 마음 졸일 필요가 없고, 군인들이 등장하고 총소리가 울려대는 와중에 땅에 얼어붙어버린 내 두 발 때문에 공포에 떠는 꿈을 꿀 필요도 더는 없을 거야.
그로부터 다시 이주간의 자가격리가 끝나면 나는 너를 만나서 네 증명사진들을 돌려줄 수 있어.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네가 홀로 사라지는 일이 생길까봐 무서웠다고 말할래. 네가 사라지는 일이 나한테 얼마만큼의 타격일까를 생각해보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몸이 사라지는 일일 것 같아. 인간한테는 오감 말고도 하나의 감각이 더 있대. 이 여섯번째 감각은 고유감각 혹은 자기수용감각이라고 불리는데, 내 몸이 내 몸이라는 것을 느끼는 감각이야. 이 감각은 우리가 느끼고 있다고 인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감각이라서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상 알아차리기 힘들대. 너를 잃는 건 내 몸의 반쯤을,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나를 잃게 되는 일일 것 같아. 내 머릿 속에서는 분명이 오른손과 오른발을 들어올렸는데 내가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이 몸뚱이의 오른손과 오른발이 꿈쩍도 하지 않는 거야. 누가 내 오른손과 발을 툭툭 치고 흔들고 주무르는데도 느껴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내 몸의 반쯤이 죽어버린 거야.
내가 나라는 것을 온전히 감각하기 위해서는 네가 나를 만져줘야 해. 내 몸과 마음의 어떤 부분들이 차갑게 식지 않기 위해서는 네가 내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답잖은 똥얘기며 빛얘기며 아이스크림 탐험에 대해서 건방질 수 있기 위해서는 나는 정말 네가 필요해. 온도를 얻으러, 나라는 감각을 되찾으러 너에게로 가. 오늘이 빨리 가길 바래. 어서 빨리 네가 사는 열한시에 갔으면 좋겠어. 술자리가 끝난 뒤 네가 집으로 돌아오면 환하게 불을 켠 채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코도 풀고 세수도 깨끗이 하고 예쁘게 단장을 한 채로 말이야. 너의 그 무덤덤한 얼굴이 나를 보고 귤처럼 싱그럽게 웃으면 내 마음에 맹세가 차오를거야. 그럼 나는 사랑한다는, 곧 사그라들고 말 그 말을 무자비하게 내뱉겠지. 좀 더 신이 나면 사랑보다 더 큰 약속을 하고 싶어서 안달 날거야. 그 하루는 어떤 똥도 끼어들지 않게 꽁꽁 싸매야지.
하루가 지나고 또 며칠이 지나서 일상에 들어서고 나면 너는 나의 너저분함을, 나는 너의 너저분함을 목격하고 특별한 날과 별일 없는 날들을 지나치고 서로가 적당히 지겨워지고 싸우고 화해하는 일을 거듭하고 노트 위에서 자유를 되새기다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산책을 나가겠지. 나는 있지, 어서 빨리 그 어리석은 일상에, 네가 있는 일상에 가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