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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n 29. 2021

경제관념이 부족해서

 동거해서 좋은 점이 뭐냐고 남자 친구에게 물었을 때 로맨틱한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경제적이다'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솔직한 사람인 줄은 알지만 눈치 없이 솔직할 때면 조금 재수 없다.


 남자 친구와 나는 호주에서 만났고 그곳에서는 애인끼리든 친구들끼리든 동거가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방 3개짜리 집 하나를 다른 두 커플과 나눠 썼다. 그에 의하면 동거는 혼자 사는 것보다 경제적이지만, 그와 나눠내는 방값마저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구걸했다. 새로 만난 여자 친구가 부모님께 돈을 타 쓰는 애기라는 걸 알았을 때 그는 그 눈치 없고 솔직한 목소리로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내게 말했다. 깔봄 가득한 눈빛이었다. 내 나이 스물셋이었고 내가 경제관념이 없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모두들 그렇게 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엄마에게 돈 달라는 소리를 멈췄다. 풀타임 일을 시작했고, 사장이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일쯤 생긴다고 하여 하던 일을 때려치우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키면서 복수를 꿈꿨을지언정 열심히 일했다. 어떤 인간으로부터도 재정적으로 독립함으로써 내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알량한 자부심이 필요했다. 내세울만한 것이나 부여잡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고 내가 영 엉만인 인간은 아닐 거라는 확인에 목말랐다. '독립'이라는 테마가 마음에 들었고, 그에 따르는 낯선 고양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부모에게서 거둬들인 빨대를 남자 친구에게 꽂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물질적으로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자 친구가 있는 집 자식이었다고 해도 그에게 눈치껏 져주면서 은근슬쩍 비위를 맞춰주고, 식당에서 밥을 다 먹고 나서 그가 계산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는 여자로 산다는 상상은 내 배알을 꼴리게 한다.

 내 것은 내가, 그 사람 몫은 그 사람이 내는 기본값이 제일 좋아서 우리의 동거는 50 대 50 법칙을 따라왔다. 공동 카드를 만들어서 생활비를 반반씩 부담한다. 따로 원칙을 정해둔 건 아니었는데, 공동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소비는- 그에게는 담뱃값, 내게는 커피값 같은 - 개인적으로 지불한다. 둘 다 최저 시급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돈을 받고 벌어오는 소득이 엇비슷했기 때문에 생활비를 반반씩 충당하는 게 맞는 일이다.

 

 임금 노동이 앗아가는 시간이 안타까운 사람이 나였다면, 남자 친구는 물 들어올 때 겁나게 노를 젓는 사람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초과 근무를 요구하면 반색하며 일했고 일이 줄면 불안해했다. 그가 불안해할 때면 그 시간을 너를 위해 쓰면 된다고 달랬지만 그는 노동하지 않는 자신을 못 견뎌했다. 아빠는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할 때마다 성실한 사람이면 코 높이지 말고 시집가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데, 아빠 취향과는 다르게 나는 너무 열심히 일하려는 남자 친구의 관성을 마주할 때마다 부담스러웠다.

 

 누군가와 오래 살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지점들에서 서로를 닮게 된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들어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이 싫어도 꾸역꾸역 한다. 일이 내 인간성의 일부분을 도려 먹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조차 돈 때문에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 돈을 버는 것뿐만 아니라 쓰는 데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부모님 지붕 밑에서는 돈 쓰는 게 내 취미인 줄 알았는데, 그와의 동거가 길어지면서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아나바다 운동 팔로워가 됐다.

 반면에 남자 친구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 것 같다. 경제관념이란 돈뿐만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아끼고 쓰는가, 하는 문제라는 인식이 그에게 생겼다. 오직 일하러 갈 때만 아침 일찍 눈뜨는 일이 가능했던 사람이 이제 자기 공부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스물네 시간 중에 어떤 시간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 욕구와 흥미를 위해서 할당되어야 한다고 그도 생각한다.

 

 서로를 쳐다보면서 우리 둘은 변해왔다. 이렇게 일해서 먹고사는 거구나 싶은데, 나나 그가 우리 나름 좀 더 성실하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와중인데, 세상이 휙휙 바뀌더니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최저시급 만원이 힘든 와중에 암호 화폐는 900퍼센트로 뛴다. 부동산이야 고질적인 문제였지만 새로이 등장하는 암호 화폐를 바라보면서 나는 뜨악하다. 남자 친구는 주식이나 비트코인과 같은 불로 소득에 긍정적이고 여윳돈만 있으면 언제고 투자해볼 생각이 있지만 우리 둘 중에 한 명에게라도 여윳돈이 생길 미래가 가깝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처럼 임금 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꿈꾸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돈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들을 힘을 믿는다. 돈이 있어야 그 극장 데이트를 가고 어버이날 부모님 용돈을 챙겨주고 친구들이랑 맥주도 마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놈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지만, '돈 때문에 두뇌를 파먹는 짓'(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무쓸모한 자존심이다. 두뇌만 파면 모를까, 두뇌와 함께 시간과 체력을 얼마만큼 소모해야 하는지 감이 없고, 설사 딱 이만큼만 혹사하겠다는 적정선을 정해둔다 해도 결국 돈 벌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장담을 못한다. 순조로운 일상을 위해 수단이 되어야 할 돈이 일상을 잠식할 결말을 피해 가기 어렵다. 일상뿐인가, 몸과 마음도 돈 앞의 노예가 된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존재를 잠식하는 위험이 항상 도처 해 있다. 무수한 광고들이 우리들의 치부욕을 부추기기 위해서 지구를 점령해 있다.

 

 돈에 관해 유연하지 못하고 꽉 막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부동산이나 암호 화폐를 술안주 삼아 불러들이는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재밌지 못하다. 그들도 나를 보면서 1800년대 산업 혁명 시대에나 어울릴 인간들이라고 생각할 텐데, 나는 그 시대에 살았더라도 자본가 계급을 욕이나 할 줄 알고 세태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해서 한참 뒤떨어진 채 살아야 했을 것 같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그게 친구가 했던 말인지, 내 속엣말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렇게 고상한 척, 덜 물질적인 척 살다가 노후도 뭐도 없이 큰 코 다칠 테야.


 꿈속에서 들은 말 같기도 하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돈 벌기에 이렇게 느긋하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그러한 무의식이 꿈에 투영됐을까.


  노후는 사실 운 아닌가,라고 맞받아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하고 싶은 걸 지금 하면서 살 거라고 다짐해봐도 때때로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싶은 불안감이 덮친다. 우리 둘이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남자 친구에게 말했지만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둘 다 잘 모른다. 임금 노동이 점점 무가치해지는 일명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우리 같은 바보들은 참으로 아날로그적이다. 아날로그라는 말이 너무 세련되게 들린다면,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라고 해두자. 이렇게 살다가 노년에는 정처도 없이 떠돌이로 지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려는 내 앞에서 남자 친구는 우리 사이에 생길지도 모르는 아이에 대해서, 우리 사이에 조그맣고 앙증맞은 그 아이가 앉아서 오물오물 아침을 먹는 식사 장면을 상상해보라며 얼마나 행복하겠냐고 되묻는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눈에 띄는 재능도 없고, 암호 화폐도 모르고, 건물주 부모도 가지지 못한 나와 그는 미래의 행복을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까.

 

 산업은 휙휙 변하고 도태되는 자들은 시시하고 작은 사람이 되어간다. 살살 좀 변해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지만 누가 대답해줄까. 거만한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피한 채 여전히 아껴 쓰고 열심히 일하면 될까. 아니면 나도 좀 더 현명한 투자자로 거듭돼야 하나. 그러려면 책을 읽고 잘 쓰지도 못하는 글을 붙드는 시간 대신에 경제지와 그래프를 부여잡고 시세를 읽어야겠지.


 어느 당 대표가 '공정'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인터뷰를 봤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서 거머쥐게 되는 지위와 그에 따른 이익들을 격렬히 인정해주는 한편, 사회가 바라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노력했지만 더 잘하지 못해서 탈락당한 나머지 사람들을 처절히 좌절시키는 공정에 대해 말했다. 노력이 시작되는 지점마저 차별받는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그의 공정 아래에서는 대접받아 마땅한 인간들과 그렇지 못한 인간들을 나누는 게, 마땅한 인간들은 당당하게 웃고 마땅하지 못한 인간들은 쭈뼛거리며 고개 숙이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 된다. 그는 공정이라는 단어를 출발선과 과정에서 모두 오염시킨 채 경쟁의 이기적인 결과물을 무한 긍정하게 만든다. (나이키 광고 you can do it에서 동사 하나 바꾼) 'You can have it'식의, 내 돈 주고 내가 사는 물건들로 권력을 표현하고, 나 아닌 주변을 바라보는 일을 불필요하고 무지하게 만드는 자아도취적이고 획일적인 공정. 그것은 일부를 우월감에 도취시키고 대다수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 고안된 공정이다. 지금 여기 있는 나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고 더 위를 쳐다보면서 달릴 수 있게 채찍질할 목적의 불행한 공정이다. 그가 말하는 공정한 세상에서는 실제로 사람들이 죽어갈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속도 죽어간다.  


 쿠팡 노동자들이 상자들 앞에 푹푹 쓰러져 죽고 산업재해 노동자들이 기계에 깔려 죽는 일이 틈만 나면 일어난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코인할 여윳돈도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것이고, 부유하게 태어나서 가난이 게으름이라고 쉽게 믿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부유할 세상에서, 나는 그래도 내 몫의 모닝커피를 즐기기 위해 애쓰겠지. 내 몫의 모닝커피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얼마큼 치열한 인간이 되어보자고 마음먹어야 할까. 앞으로 나는 어떤 모양의 돈을 벌어 들여야 할까.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문화를 즐기는 삶을 이어할 수 있게 된다면 바지 뒷 호주머니에라도 최소한의 양심을 챙겨뒀으면 좋겠다. 내가 똑똑하고 잘난 덕이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버리길, 버릴 수 없다면 감추는 예의라도 갖추길 바란다. 뭐라도 해보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 노후를 꿈꿀 수 없게 되더라도 너무 나쁜 태도로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괴팍한 사람이 되는 거야 어쩔 수 없더라도 나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 사람으로 살다 죽기를.


 시대의 흐름에 나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고 방구석에 앉아서 채워지지 않는 흰 화면에 글자를 쓰고 지우거나 '기본 소득이란 무엇인가'같은 책을 읽으면서 빨갛게 타버리는 여름에 있다. 조건 없는 기본 소득이 상징하는, 모두 함께 잘 살아보자는 분배의 공정이 살아남을지, 아니면 이 순간에도 나만은 안 망할 거라고 자신할 개인들이 심화되는 불평등 속에서 다 같이망해갈지 저명한 경제학자도 알 수 없다.

 

 남자 친구에게 맥주나 마시러 가자고 했다. 전혀 경제적이지 못한 두 인간의 불안을 씻어내는 데에 한여름 맥주만큼 깔끔한 것도 없어서. 아, 맥주를 마시면서 <노매드 랜드>나 다시 한번 봐야겠다. Fern의 무심함과 강인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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