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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pr 26. 2016

네가 얼마나 내게서 타인이든

 일상을 묶어두고 홀로 떠나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들 곁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너에는 끝까지 엄격할 나를 대체 어떤 식으로 길들이면 좋을까.


 그렇게 진도 팽목항에 갔다.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어서거나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발화할 수 없는 내 외로움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말살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외롭지 않을 수 있었나.


  

영화 <나쁜 나라>를 봤다.  참사 2년이 지나서야 이제서야 그들의 슬픔이 보인다. '몰랐어요. 이렇게나쁜 나라일 줄. 우리 아들이 엄마한테 세상이 잘못됐단 걸 알려주려고 먼저 갔나봐요.' 엄마가 울부짖는다. '후회합니다. 예전에 이랜드 사건이 있었을 때 도와달라는 외침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어요.' 벌을 받는 얼굴로 아빠는  말한다. 자식을 잃은 엄마와 아빠는 길바닥에서 자는 잠에 개의치 고, 그 바닥에서마저 쫒겨나는 것에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그들에게서 번번히 고개를 돌린다. 그들의 격분을 망치질로 봉인해가며 자기들만의 춤판을 벌인다. 이 나쁜 나라에 엄마와 아빠는 슬픔을 먹으며 자책과 반성을 이어하고, 그들의 대척점에 완장 찬 이들은 눈에 뵈는 것 없는 행진을 계속한다.


  나는 내가 타인의 고통에 진정 아할 줄 모르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함부로 공감하는 것을 경계한다. 슬픔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런 경계와 이성을 넘어 세월호의 슬픔에 괴로워졌다. 세월호는 더 이상 뉴스 기사거리로 그치지 않고 나를 찌른다. 나의 일상이 소중할진대 그 아이의 소중한 모든 것은 죽었다. 그 아이의 모든 것이 죽었을 때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죽지 않고 싸운다. 그들이 끝까지 싸우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될 수 없지만, 나는 죽어도 나로 죽을 수 밖에 없지만, 많은 순간 나는 차가운 사람일 수 있지만, 그렇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밖에는 살아갈 도리가 없고, 사람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고 믿기에, 네가 얼마나 내게서 타인이든 그래도 너는 나처럼 사랑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사랑을 잃은 것은 모든 삶을 잃은 것이겠지.

 그들은 너무 억울하게 모든 걸 잃어버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세월호 편을 방영했다. 배가 침몰해가는 와중에 해경본청과 청와대 사이에서 오간 통화내용을 듣다보면 개나 소나 청와대에서 일을 하구나 싶다. 해경본청은 세월호가 침몰해가는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적극적인 보고를 대신하여, 관료주의에 젖어 묻는 것에 대답만 하는 어리석음을 들켰다. 청와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상황 해결을 위한 질문은 안중에 없고,  베리임폴턴트한 사람에게 올릴 인원 보고가 제일의 사명인 듯 끊임없이 '인원 체크'를 요구한다.

 <뉴스타파>에서는 세월호가 출항한 당시의 실제 적재 화물 중량이 검찰 수사 결과보다 500톤 이상 많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침몰 원인에 대한 의문점을 던지고,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는 세월호 항적의 편집 및 조작에 대한 추궁을 계속해가고 있다.


 세월호에 눈과 귀를 열고 나자 온갖 의혹들이 보인다. 의혹으로 그치기엔 너무나 명백히 조작된, 그래서 터무니없는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나는 지금의 정부가 이를 또 어떤 식으로 포장하려 들지가 궁금하다.

 나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내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는 부를 가진 자의 것, 권력을 가진 자의 것, 대통령의 것 밖에는 되지 못한다. 당연하면 안될 사실 앞에서 자연스레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면 좋을까.


 

정치는 생활이다. 정치는 생활이여야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들 탐욕대로 권력대로 멋대로 판을 만들어가는 것을 국민으로서 두고만 본다면 기다린다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싶다. '내가 여기 있다'는 목소리가 아니라 '한 사람 더 여기 있다'는 목소리.

 세월호 유가족의 한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서있어줘야 하는 한이다. 저 희생의 다음 차례가 나일거라는 공포 이전에, 무능함에 오만하기까지 한 이 나라에 대한 분노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할 사람을 쳐다만보다  잃어야했던 처절한 마음들에 대한 슬픔이 먼저이길.


 세월호의 비극을 지나오며 나는 무관심했고 어떤 이들은 싸늘했지만, 열심히 분노하고 슬퍼하며 행동한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다. 그러한 사람들이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해 애써왔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목소리라도 내볼까, 용기낼 기회를 갖는다. 그 모든 따뜻한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진보파리(팔이?)라는 말을 주워들었다. 이슈가 되는 사회적 사건이 터지면 열을 올리다가, 그것이 이슈로서 기능이 다하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겨타며 진보를 선전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어떤 말을 남기는 것 자체가 망설여졌던 것은 나 또한 진보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파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좀 더 지구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오래 살아남아야겠다. 오래 살아남아 오래 슬퍼하고 끈질기게 분노해야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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