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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12. 2018

[일기] 한국 여행기1

안녕, 이모

 이모 A는 '물욕'이라는 단어를 말했다. 가영아, 너는 물욕이 좀 있어야 돼. -- 이모 이번에 건물 샀잖아. 이모 친구 중에 대단한 건물주가 한 명 있는데, 걔 도움 좀 받았어. 나한텐 걔가 건물주고, 걔는 나를 정신적인 물주라고 불러. 깔깔깔.

 통화가 끝나고 그녀의 카톡 프로필을 봤다. 

"중산층! '책을 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회 문화적 수준이 중간을 이루는 집단.'" 

이모 A가 되고 싶은 것은 결국 중산층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모 A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누군가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갖고 싶다. 그것이 그녀를 명명해줄 것이다. 중산층인 이모는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가르치기 좋아한다. 그것이 선의임을 믿는다. 


 이모 B와도 통화했다. 오랜만이였는데, 똑같은 '물욕'을 말한다. 

나는 그 물욕이란 게 정말 물질에 대한 욕심을 말하는 것이라 맹하게 받아들여서, 아 이모들이 나를 잘 모르구나, 나 엄청난 물욕의 소유자인데, 하고 말았는데, 이모들이 물욕을 끄집어낸 궁극적인 이유는 '네가 사는 게 사는 거니. 제대로된 직업이라도 있어야지.'를 대신한 것으로 그녀들은 내게 일깨움이란 걸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모 B의 말들은 거칠었다. 가영아 밖에 나가 사는 사람들은 결국 다 제 나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너 여기와서 뭐하고 살건데? 너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잖아. 이모가 장담하는데 너 후회해. 후회한다고. 네 남자친구는 거기서 무슨 일한다고 했지? 아이고 참, 똑같네. 똑같이 큰일이다 진짜. 인생 그렇게 살다간 후회하는 거야. 후회하는 거라고. 내가 다른 삶들 안 살아봐도 다 알아, 어떻고 어떤지를. 이제 네 나이가 적은 나이가 아니야. 그만 방황하고 어서 네 앞가림을 해야지. 너희 엄마는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도 못할 걸 알아서, 내가 대신 말해주는 거야.


 나는 이모의 후회한다는 저주를(다섯 번은 넘게) 연이어 듣고 있다가 분개했고, 그의 말을 되받아쳐야 했다. 몇 번이고 참을까 망설이다,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더욱 도가 지나칠 이모의 입에 솜뭉치라도 넣고 싶었다.  

 이모, 나는 한 번도 이모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이라고 이모 인생을 부정한 적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니까. 이모는 어떻게 다 살아보지도 못한 내 삶을 그렇게 단언하고 저주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 이모는 이모 별에서 이모 친구들하고 살면 되고, 나는 내 별에서 내 친구들하고 살면 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살아서 이모한테 어디 피해준 게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누구나 누구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는 거야. 그렇게 함부로 판단하며 말로 상처주는 이모야 말로 내게 해를 가하는 거야. 이모 말처럼 나 서른이 가까워오고 어리지 않아. 그만큼 내 인생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중이야. 그러니까, It's none of your business. Close your mouth please.


 엄마와 두 이모들은 매일같이 연락하는 사이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이모 A와 B는 두 사람 다 결혼 하지 않은 아가씨였고, 내가 너무 예뻐 먼 곳까지 나를 보러 오곤 했다. 

내가 다섯 살 되었을 때, 이모 A가 첫째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얼마나 예뻤는지 나는 기억한다. 

그녀가 연이어 둘을 더 낳아 키우며 더욱 더 엄마가 되어갈 때, 나는 묻곤 했다.

이모, 애기 낳는 건 많이 아프고 키우는 건 더 힘들겠지? 나는 아마 애기 못 낳을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할 만해.  

이모 B도 첫째를 낳고, 둘째아이를 가졌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모, 애기 낳는 건 많이 아프고 키우는 건 더 힘들지? 나는 아마 애기 못 낳을 거야.

 어.. 나 죽는 지 알았어. 다신 못 하겠다.

그럼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얘 겁을 주냐고, 이모B는 이모 A에게 혼났다.

 막내이모의 막내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그 엉뚱한 아이가 혼자서 택시를 타고 도서관도 다녀올만큼 성장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내가 자라나는 것을 지켜봤고, 이제 나는 그들의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바라본다. 


 방학 때면 엄마는 어디 유학을 보내듯이 나를 이모 A집에 맡겼다. 

걔가 얼굴은 못생겼어도 얼마나 똑똑했는지 모른다. 만물박사라고 불렸어. 동네 어른들이 잘못 말하면 그게 아니라고 함부로 덤벼들고 그랬어. 그러니까 혼자 독하게 공부해서 대학까지 갔지. 엄마는 뭐했대? 나는 뭐 예쁜 거 믿고 까불다가 너희 아빠나 만나서 이렇게 살지. 

 나는 이모 A 집에 지내는 동안 아동필독 도서목록을 섭렵했고, 매일같이 일기를 썼고, 수학 문제집을 풀었다. 이모는 그 때도 무엇을 가르치는 것에 일가견이 있었다. 첫번째 이모집 유학 이후로 학교에서 치룬 중간고사에서 나는 전교 5등인가를 했었다. 그 전까지 내가 시험은 감으로 찍는 거라고 알고 있던 용감무쌍한 아이였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결과물을 (내가 아닌) 이모 A는 만들었다. 엄마가 한 번도 신경써본 적 없는 내 방학 숙제에도 이모 A는 철저함을 요구했고, 선생님들은 내가 그려온 그림의 꼼꼼함과 독후감의 빼곡함을 보고 놀라셨다.     

 하루 할당된 공부를 마치고 돌아서면 이모부가 퇴근해 와 계시고 나라는 방방 뛰어다니고 미래는 아빠 품에 안겨 웃는,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이모집을, 그것을 요리해내는 이모를, 나는 우러러봤다. 내가 진짜 이모 딸이라면, 그래서 돌아갈 곳이 없어도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비밀스럽게 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불빛에 섞여 있다는 어색한 기분만 걷어내고 나면, 대구에 있는 진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서운하기만 했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간 대구집은 내 집이라는 안도감을 주는 곳이였지만 속하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았고 먹고 싶은대로 음식을 먹었고 저녁이면 책 대신 텔레비전을 봤다. 내게 아빠는 술과 담배 냄새로 상징되고 엄마는 밥과 드라마였다. 부부싸움의 난잡한 시끄러움과 주기적으로 내가 감당해야했던 많은 나쁜 시간들 속에서 어찌됐건 나는 커갔다. 

 

 내가 자라나는 동안 이모 A는 내게 물을 줬고, 내 숙인 고개를 자주 치켜 올려줬다. 왜 가끔씩 그 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물음을 생각하다 보면 나는 꼭 이모 A를 생각한다. 내게 이모의 손길이 없었다면 나는 좀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싫어하기에 충분한 배경들 속에서 나를 싫어하는 것 대신 다른 이들을 속이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 속임수로 인한 자괴감을 느낄 때마다 이모 A는 나를 안아주는 사람 같았다. 웃긴 생각이지만, 이모 A와 동류의 피가 내게도 조금은 흐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내가 꼭 회색 구역에 머물러야 할 인간은 아닐 거라 믿었다. 

 

이모 A의 존재감이 내게서만 빛을 발했던 것이 아니였다. 


결혼 전 이모 B는(막내이모)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그런 남자였던 것 같다. 이모 A는 끈질기게 이모 B를 설득했고 결국 두 사람 사이를 정리해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찾아낸 지금의 이모부를 이모B 옆에 붙여 놨다. 이모부는 돈도 있고 능력도 있는 그런 남자였다. 

이모 B는 지금의 이모부와 결혼 했고, 애 둘을 낳고, 때가 되면 명품 가방과 향수를 선물받고, 일 년에 한번씩은 해외여행을 간다. 

 그러나, 꼬박꼬박 돈을 많이 벌어오는 이모부는 대신 이모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모부의 의심은 끝이 없다. 이모는 함부로 친구들을 만나러 갈 수도 없고, 맘 내키는 날 친언니를 보러가는 것도 머뭇거려야 한다. 이모부의 허락이 필요하고, 이모부는 무엇이 되었건 이모의 외출을 반기지 않는다. 

 참다 못한 이모 B는 이혼을 결심했고, 이모 A네 가족들이 어떻게든 이혼은 막기 위해 이모 B집에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막내이모는 아직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 중이고, 그 일을 알리 없을 내게는 행복하다는 말을 했다. 

아, 그 때 내가 그냥 그 남자 만나게 할 걸 그랬어. 

이모 B의 이혼 소동을 전해주던 이모 A는 엄마에게 뒤늦은 후회를 전한다.


 (만약 이모 B가 지금의 이모부가 아닌, 그 때 이모가 좋아했던 아저씨와 결혼했다면. 

상상을 하려는데, 아무래도 이모 B는 그랬을 리가 없을 것 같다. 이모 B는 보다 수동적인 사람이므로. 이모 B에게는 언제나 똑순이 언니가 옆에 있어서, 언니가 알아봐준 직장에 다니고 언니가 알아봐준 남자를 만나고 언니가 알아봐준 삶을 살면 되지 않나.)


어떤 안녕은 한 인간의 자기 인식을 위해 필요하다.  

 

내 방황이 시작된 후로, 나는 고의적으로 이모 A와 헤어지기로 했다. 이모 A는 내가 겪고 있는 시간과 체험을 반기지 않았고, 그래서 나를 교육시키고 싶어했다. 그 가르침이 나를 헤쳐서라기보다는, 그것은 이모가 사는 중산층 세상의 언어들이였고, 도통 내 마음에 와닿지 않는 말들이였다.  내가 속하고 싶은 곳이 더 이상 그 노란집이 아니게 되어버렸거나, 혹은 좀 더 많은 부를 갖게 되고 좀 더 나이를 먹은 이모가 좀 더 높은 위치로 옮겨갔거나. 나는 '내가' '체험'할 세상이 필요했고, 이젠 그곳의 언어들을 먹고 자라고 싶었다. 이모 A가 주는 물은 나를 관통하기보다는, 뻔하고 지겨운 것이 되었다. 

 나는 이모 A와 헤어지고, 다시 이모A를 만나는데 그것은 그 전의 것과 전혀 다른 인간 관계가 된다. 이모와 이별한 후, 나는 이모를 올려다보지 않고 마주할 수 있으며, 그녀의 도움을 기다리는 대신 나의 결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모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보다, 그녀가 내 이모라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모는 나를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내 인생을 조심스럽게 비난하지만, 그럴 때 나는 그녀가 내게 가진 애정, 그녀로부터 받은 보살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기로 한다. 이모 A는 내가 그녀에게 부여한 큰 상징성을 벗고 이제 그냥 이모 A가 되었다.   

 

 이모 B에게는 여전히 이모 A가 그녀 삶의 구원자다. 

이모 B의 언어에는 '체험'이라는 단어가 살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보지 않아도 대부분의 삶이 어떠할지 안다고 확언하는 사람이다. '체험' 대신 강한 '믿음'이 이모 B를 이룬다. 현재 자신이 살아야하는 삶이 옳을 수 밖에 없다는 믿음, 자녀의 성공에 대한 믿음, 돈과 물질에 대한 믿음, 명예에 대한 믿음, 화려함에 대한 믿음, 무엇보다 언니에 대한 믿음. 이모 B는 이모 A의 길을 따라 왔고 앞으로도 별 무리없이 그녀의 가르침을 이어받을 것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선택하지 않았을 뿐, 결국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예쁜 길을 예쁜 모습으로 걸으면 될 일이다. 


 대신 나는 집을 나왔고, 아빠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덕분에 땀냄새나는 길들을 많이 걸었고, 살아있는 것들을 봤다. 이모집 유학을 그만뒀고, 이모를 이모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절을 떠났고, 스님은 내게 가장 그리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자라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중 몇몇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나는 내가 되는 연습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더 사랑할 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이 내 삶에의 솔직한 태도라 생각한다. 슬프지만 어떤 이별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모 B와 통화가 끝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 A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영아, 막내이모가 혹시 너 상처받았까봐 걱정해 하더라.

그래? 상처가 되진 않는데, 기분은 많이 나쁘더라. 

안그래도 나라가 가영언니한테 왜 그런 소릴 했냐고 핀잔 주더라. 

한국에서나 무슨 직업을 가진 게 중요하지, 캐나다 사람들은 별 신경을 안 쓴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나라가 그런 말을 해? 고맙네.

가영아, 막내이모가 너가 걱정되서 그런 얘기를 한거니까 네가 조금 이해해줘.

그래, 알겠어. 걱정마 이모.

 

이모 B는 사과도 이모 A가 대신 해주나보다.

오랜 시간 서로를 지켜봐온 가족에게조차 '이해'란 단어는 멀고 어렵다. 

아마 나와 이모들은 서로 이해해주는 관계보다는 서로 지켜봐주는 것이 최선인 관계가 아닐까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그녀의 아이들이 하나씩 자라나는 것을 지켜봐주고 싶다. 그 아이들이 가질 자신만의 세상에 그들 나름대로 흠뻑 젖어드는 것을 지켜봐보고 싶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나라의 우상인 언니는 못되더라도, 이나라의 언니로서 그 애가 겪는 시간들을 멀리서라도 지켜봐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애에게 큰 힘이 될 어떤 날들이 오지 않을까.    



* 영화 call me by your name 중, 아빠가 엘리오에게. 


Right now, you may not wanna feel anything, maybe you never wanted to feel anything, 

and maybe it's not to me you'd want to speak about these things, 

but feel something you obviously did.


Look, you had a beautiful friendship.

maybe more than a friendship. and I envy you.

In my place, most parents would hope the whole thing goes away.

Pray their sons land on their feet.

But, I'm not such a parent.

We rip out so much of ourselves to be cured of things faster, that we go bankrupt by the age of 30. And have less to offer, each time we start with someone new, but to make yourself feel nothing so as not to feel anything. 

What a waste.


Have I spoken out of turn?

and I'll say one more thing, it'll clear the air.

I may have come close, 

but never had waht you two have.

something always held me back, or stood in the way.


How you live your life is your business.

Just remember, our hearts and our  bodies are given to us only once,

and before you know it, your heart's worn out.

And as for your body, their comes a point when no one looks at it, much less wants to come near it. 

Right now, there's sorrow, pain. Don't kill it.

And with it, the joy you f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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