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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 돌고래 Mar 14. 2021

Van 04. 그들의 신이 나에게 물었다

밴쿠버 원주민의 기원: 인류 박물관

 우리는 매일같이 세상 밖으로 나갈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애처로운 일인지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잊고 살아가던 그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워준 것은 밴쿠버 인류 박물관에 전시된 삼나무 조각상이었다.

 

밴쿠버 인류 박물관은 캐나다 원주민(특히 하이다 족)의 기원과 문화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원주민 신화를 조각한 토템폴과 탈 등의 전시물을 둘러보며 지구 반대편에서조차 인간은 ‘삶의 기원’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족 신화에는 그 민족 고유의 의식이 깃들어 있어서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와 하이다족의 창세 신화가 있다.


한국의 장승 문화를 연상시키는 하이다 족의 토템폴

 

박물관 대표 전시물은 2층에 전시된 삼나무 조각상으로 하이다 족의 창세 신화를 나타낸 <갈까마귀와 최초의 인류> (The Raven and First Men)라는 작품이다.

 

내용인즉슨 태초에 '미완성 인간'들이 커다란 조개 안에서 살고 있었는데, 조개에 갇혀 사는 삶에 안주하던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갈까마귀로 변신한 창세신이 날아온다.

 

"밖으로 나와봐!"

신은 평화로운 조개 안 그들을 불러낸다.


그들 중 몇은 미지의 세계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조개 안의 안락함을 선택했고, 다른 몇은 바깥 세계가 더 궁금했기에 익숙한 세계를 포기하고 조개 밖으로 나왔다. 세상을 마주한 그들은 각성하여 최초로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밴쿠버 원주민의 창세 신화를 조각한 Bill Reid의 <First Men>

 

웅녀가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수행을 한 끝에 인간이 되었다면 반대로 하이다 족은 밖으로 나와 빛을 보고서 인간이 되었다. 백 일 동안 맵고 쓴 쑥과 마늘만 먹는 고통을 감내해내라는 혹독한 미션에 비하면 하이다 족의 인간 되기는 거의 거저먹기 아닌가!


그런데 어쩌자고 빌 리드 (조각상 아티스트)는 조개 안 그 녀석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은 걸까. 몸만 조개 밖으로 쑥 빼내면 인간이 된다는데도 어떤 놈은 꽁무니를 빼고 숨어있기 바쁘고 어떤 놈은 쇼크 받은 듯한, 혹은 갈등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딱 한 녀석만 나올 준비가 됐는지 몸을 밖으로 빼내는 중이다.

 

빌 리드는, 그리고 하이다 족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는 선택은 쑥과 마늘만 먹으며 인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신이 기회를 주었을 때 꽁무니를 빼고 숨어있던 녀석은 아마 안주하는 삶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 나가는 게 좋을지 아닐지 결단이 서지 않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녀석은 ‘인간’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이 되고 싶다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아마 2%쯤 부족했을 테고. (공감 x100) 마지막 녀석만 유일하게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내 주변에도 그런 강한 멘탈을 가진 인간들이 간혹 있다…)

 

마지막 녀석은 다른 녀석들과 대체 무엇이 달랐길래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벌써 밖으로 몸을 반쯤 빼놓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추측해보건대 창세신이 그를 찾아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은 인간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그 믿음 때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 밖으로 발을 디디는 모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나를 깨우러 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마치 '다음은 네가 나올 차례야'라는 듯 창세신 갈까마귀는 조개가 아닌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딱 부러지는 대답 대신 세상 밖으로 나와 밴쿠버 원주민의 조상이 되었다는 남자의 얼굴을 한번 더 살폈다. 고집스레 앙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은근한 미소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새어 나오고 있었다.


똑 똑 똑 -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그의 얼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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