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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Jun 26. 2019

오징어 타령

동네 슈퍼에서 오징어채를 사왔다. 한 입에 넣고 씹기에는 좀 길어 가위로 반 토막을 냈음에도 입에 들어가자마자 입천장을 찔러댄다.

‘이런 경을 칠!’


나는 장작개비처럼 단단한 오징어채를 원망 섞인 눈으로 째려본다.

예전엔 흔해빠진 게 오징어, 명태였는데 요즘은 이름 앞에 금자까지 붙인 귀한 몸이 되었다. 기후변화 탓인지 어획량이 턱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란다. 원양어선으로 잡은 명태는 동해 바닷바람으로 말린 다해도 예전의 북어 맛은 아니다.


모름지기 북어는 다듬이 방망이로 흠씬 두드려 주어야한다. 몸통이 나긋나긋 해지면 쪽쪽 찢어 참기름에 버무린 북어채 무침이 일품인데 허우대만 멀끔한 요즘 북어는 꼭 실타래 씹는 맛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 혀도 늙어 그 맛이 그 맛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내 혀의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질이 떨어진 것만은 확실하다.


오징어도 명태와 같은 운명이다. 두툼하고 큰 덩치에 비해 맛은 맹맹하다. 맛을 살린다고 감미료로 느끼하고 달달하게 만드는 바람에 본래의 짭조름하고 콤콤한 맛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무릇 오징어 맛을 제대로 보려면 굽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제일 안쪽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어보라. 그리하면 천천히 불리는 과정을 거쳐 진짜 오징어의 참맛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좋은 오징어는 오래 씹을수록 단물이 나오는 법이다.


먹는 타령을 하다 보니 모처럼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근거가 있어 하는 말은 아니고 오래 살다보니 자연히 터득한 건데, 잠자리에 들기 전, 반쯤 졸며 TV 볼 때, 속이 헛헛하고 오징어가 먹고 싶어지면 그건 바로 내 몸이 단백질을 요구한다는 신호다. 요즘이야 냉동실에서 몇 달씩 잠자고 있는 고기 덩이쯤은 예삿일이지만, 예전엔 특별한 날 아니면 곰국이나 불고기를 구경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냉장고 없던 시절엔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매일 시장을 봐다 즉시 조리를 하였으니 냉동고기 해동하면서 육즙 빠져나가는 씁쓸한 경험은 아예 해볼 기회가 없었다. 한 여름에는 남은 음식을 시원한 뒤꼍 그늘로 피서를 보냈는데 가끔 길고양이 밥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궁한 데로 대나무 찬합이나 소쿠리에 고기나 생선을 넣어 추녀 밑에 대롱대롱 매달아놓아야 했다. 오징어에 관한 얘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다. 내게 있어 오징어는 단순한 심심풀이 땅콩이 아닌, 제일 먹고 싶은 일 순위 먹거리로 등극한 역사적인 사건을 고찰하려 함이다.


까마득한 옛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여름에 우리 가족은 청량리에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다섯 살 위 언니와 십년 터울의 남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였다. 전쟁이 났을 때 우린 청량리에서 홍능으로 가는 길가에 반듯하게 전통 한옥을 지어 이사한 지 이년 남짓 되었을 때다. 나는 효제초등학교 6학년 어린 학생이었고 언니는 배화고녀 4학년 다 큰 처녀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요일, 난데없이 전쟁이 났다고 했다. 그땐 어느 집이나 다 그랬겠지만, 전쟁이 났다는 사실도 라디오에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불확실한 정보가 고작이었다. 우린 그날 청량리에서 왕십리로 피난을 가긴 갔다. 폐광이었는지 아니면 터널 공사를 하던 중이었는지, 어쨌거나 우리 여섯 식구는 굴속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북새통에 많은 사람들이 한 군데에 엉켜들어 지례 밟혀죽을 판이라서 그럴 바엔 집에서 폭격 맞아 죽는 게 낫겠다는 각오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여름, 유엔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수복되기까지 석 달 동안 미처 피난 못가고 서울에 처진 사람들은 사생결단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어머닌 난생 처음으로 동대문시장 바닥에 나앉아 돼지고기를 구워 팔았다. 언니는 한참 피어오르는 17살 처녀고 명색이 버젓한 약혼자도 있으니 함부로 시장에 내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풍로며 숯을 나르는 허드렛일은 모험심으로 피가 들끓는 12살짜리 둘째딸, 내 차례였다. 그러나 막상 짐을 날라 놓고 나면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석쇠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돼지고기를 보고 있으면 입 안에 침만 가득 고였다. 눈치껏 엄마가 고기 한 점 입에 넣어주기를 학수고대했으나 매정한 엄마는 손님 입에만 정신이 팔려 침 흘리는 딸은 안중에도 없었다.


모녀가 시장 바닥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아버지도 용케 일거리를 찾아냈다. 인민군인지 보위대인지 아무튼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플랜카드며 포스터 제작하는 일을 맡겼다. 이른 아침 어느 날, 일하러 나가던 아버지가 환한 얼굴로 대청마루에 서있던 나에게 다가 오셨다. 뽀뽀를 하시려나 했는데, 뽀뽀 대신 넌지시 물어보셨다.


“제일 먹고 싶은 거 말해봐라, 오늘 내가 사다주마”

나는 반색하며 얼른 생각해보았다.

‘너무 귀한 음식을 말했다가 아버지가 못 구하면 실망하실 테고, 과자나 사탕 나부랭이는 아버지에게 모처럼 으스댈 기회를 줄 수 없을 테니, 무엇이 좋을까?’


“오징어! 내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은 마른오징어야”

나는 호들갑을 떨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 없으니 돈 벌러 나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걸 삼켜버렸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까지 두고두고 이 작은 일화가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게 될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 때 오징어타령만 안 했더라면 아버지의 삶이 자유로웠을까? 뭐 어차피 결과는 똑같았으리라. 전쟁 중에는 미친바람이 부니까.


9월에 서울이 수복되자 홍능에 주둔해 있던 인민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강다리 끊겨서 고향 논산으로 내려가지 못해 우리 집 다락에 숨어있던 언니의 약혼자 서울대생이 한달음에 홍능으로 달려가 인민군이 버리고 간 쌀가마니를 등에 지고 왔다. 우리 자매가 환호성을 지르며 급히 열어보니 콩만 가득 들어있었다.


서울을 떠났던 사람들이 속속 돌아왔다.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나 했는데 이번엔 눈빛이 살벌한 완장 찬 젊은 청년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마당에서 할머니와 두부를 만들고 있던 아버지를 붙잡아 갔다. 아버지 옷자락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며 울부짖어도 소용없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에 동원된 것이 문제라는데, 그 시절 서울에 남은 건강한 남자 중 인민군한테 불려 다니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아버지가 유치장에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언니가 양주 한 병 구해들고 종로경찰서에 찾아가서 아버지를 구해낸 사건은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전시라 해도 모두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 목숨이 양주 한 병이라니... 아버지가 고문을 받고 축 늘어져 업혀 들어왔을 때의 참담함을 잊을 수 없다.


건강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버진 몸을 추스르자마자 좌익성향의 책부터 책장에서 꺼내 다 태워 버렸다. 혹자는 아버지가 죽도록 맞고 나서 제정신을 차렸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훗날 내가 아버지께 듣기로는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 당했던 석 달 사이에 이미 좌익의 이념에 대한 환상이 무너졌다고 했다. 지식으로 쌓아올린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직접 체험한 것이다. 자발적인 부역인지, 돈을 받고 일한 노동인지는 굳이 묻고 따지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한 일은 오직 가족을 부양하기 위함이었다. 그 일로 아버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치렀고, 오랜 세월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짧은 생계 활동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아버지는 1.4 후퇴 때 진해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중도에 청주에 주저 물러앉아 10년을 기다리다가 나이 50을 넘기고서야 큰 딸 성화에 못 이겨 서울로 입성했다. 혁(赫)이라는 멋진 필명도 버리고 모두에게 낯선 아명을 쓰신 것도 아버지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과 환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조각하는 친구 분과 가끔 술을 나누며 조용히 사셨다. 장사 속이 어두운 분인데도 신촌 로터리에서 꽤 오래 문방구를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고문했던 사람이 찾아왔다. 그 얘기를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듣고 난 기절할 뻔 했다.

“뭐야 여태 감시를 했다는 거야? 아직도 고문 기술자래? 아니면 돈 뜯어가려고 협박하는 거야?”

아버진 내가 흥분해 떠드는 것을 보며 빙그레 웃으셨다.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땐 어쩔 수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하더라.”

“겨우 그 말 뿐이야?”

“존경 한다더라”

“누구를?”

아버지가 씁쓸히 웃으셨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20년이 넘었다.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시다가 날개 한번 활짝 펴보지 못하고 생을 보내 버렸다. 이젠 좌도 우도 없는 천국에서 편히 지내시나요? 요즘 정치판에서는 대놓고 서로 좌파니 우파니 하도 싸워대니 옛날 같았으면 입도 뻥긋 못했을 오징어 타령을 용기 내어 한번 읊어 봤다.


‘그 사람은 발 뻗고 잘 살았을까? 지금은 당연히 죽었겠지?’

나도 슬슬 오징어 타령을 그만 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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