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명숙 Mar 22. 2019

버드나무 아래 소년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큰손녀가 남자 친구와 찍은 셀카 사진을 가족 카톡에 올렸다. 그 며칠 후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단연 손녀의 남자 친구 이야기가 주메뉴였다. 서로 얼굴들 보자마자 ‘경사 났네. 경사 났어’로 인사를 대신하며 웃었다.


우리 내외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다. 큰아들이 늦장가 가서 얻은 딸이 올해 29살, 지금 영국에서 현대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다. 내 손녀라 하는 말이 아니고 심성이나 인물이나 빠질 게 없는데 어찌 된 셈인지 그 나이 되도록 한 명의 남자 친구도 없었다. 큰아들 내외는 결혼 9년 만에 헤어졌다.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손녀는 그때부터 제 어미와 떨어져 아빠와 단둘이 살았다. 혹시 그래서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남녀의 사랑을 경원시하는 것은 아닌가? 난 별별 추측을 다 하면서 혼자 끌탕을 했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사진 한 장에 모든 시름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나이도 한 살 연하에 인물도 훤하고, 그나저나 제일 맘에 드는 것은 내 손녀를 죽자 살자 좋아한다는 거다. 언어학을 전공한다는 그 친구는 4개 국어를 빠삭하게 한다는군! 아뿔싸!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었네. 그 아인 집안 짱짱한 대만 토박이외다.


내가 손녀 나이 때는 아이 셋 딸린 엄마였다. 누가 뒤에서 붙잡으러 오기라도 하는 양, 허둥지둥 결혼해버렸기 때문에 이성 간에 애틋한 감정을 알 리 없었고, 사랑 타령하는 사람 보면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다 해도 가랑잎만 굴러도 깔깔대던 처녀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는지라, 피난지 시골 청주에서,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무렵, 연애박사 친구들 등쌀에 밀려 나도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볼까 하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남학생과 말만 섞어도 이상한 소문에 휘말리던 시절이라 아예 언감생심 엄두도 못 냈었는데, 한번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자 호기심과 오기가 나날이 자라났다. 그러나 막상 결심은 섰지만 마땅한 남학생이 있을 리 없었다. 한 학년 위는 나보다 덩치가 커서 무섭고, 한 학년 아래는 코 흘리게 같고. 그래서 괜한 모험은 접기로 하고 같은 학년에 공업고등학교 미술반 반장 아이로 점을 찍었다.


그 아인 토건업을 하는 청주 토박이 김 씨 가문에 태어나 한마디로 막중한 책임을 걸머지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이 선량해 보이는 그저 착한 아이였으나 매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보다 덩치도 작고 소심해 보이는 데다, 우선 말을 튼 사이니 만만했다. 미술 전시회가 있거나 큰 행사가 있으면 각 고등학교 미술반 학생들이 모여 플래카드나 포스터를 그리곤 했는데 그 애는 나보다 한 살 위인데도 내 앞에서 눈도 바로 못 떠 건방진 내가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보이네

1956년 충북 학도 미술전 수상자들 (가운데 여학생 중 왼쪽이 청주여고 2학년의 나, 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학생이 '그' 소년.   


찌찔이라고 눈길도 안 주었는데,
지금 보니 훈남들이었군.
풋풋하게 젊은 그들을 지금은 내가
부모 마음으로 바라보는 탓이려니...    
- 81세의 내가  
         

요즘은 청주도 많이 변했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조치원에서 청주시로 들어가는 도로가 봄이면 벚꽃으로 터널을 이뤘고 시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무심천 또한 유명했다. 여름밤엔 목욕도 하고 낮엔 빨래꾼들로 사시사철 붐볐다. 냇가에 빨래 삶는 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자갈밭에 널어놓은 이불 홑청이 바람에 펄럭였다.


난 첫 미팅 장소를 무심천으로 찍었다. 제과점도 있고 과수원도 있긴 했으나 쓸 돈이 없었다. 무심천변을 따라 긴 둑을 걷다 보면 그 위 저수지까지 이어지는데 바로 그곳이 남녀가 즐겨 찾는 장소였다. 둑을 따라 드문드문 버드나무가 서 있고 바닥까지 늘어져 있는 버들가지는 은밀한 그늘을 만들어 냈다.


내가 그 아이를 불러낸 날을 기억하긴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방학이 끝날 무렵 달이 기운 그믐이란 것이다. 추석 쇠려고 서울서 진즉 내려와 있던 언니의 옷 중에 감촉이 부드럽고 어깨 주름이 풍성한 잔잔한 꽃무늬 블라우스가 있었다. 난 교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언니의 블라우스를 말없이 훔쳐 입고는 내친김에 언니의 향수도 한 방울 뿌리고, 누가 볼세라 뒷문으로 나와 무심천 둑 버드나무 밑으로 달려가 그 아이를 기다렸다.


그날, 코를 베어 가도 모르게 어두운 밤인 것을 계산하지 못한 나는 기껏 치장했어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저녁을 거르고 나간 탓에 속은 쓰리고 익숙잖은 향수 냄새 때문에 속까지 울렁거렸다. 그 아인 만나자마자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난 평소의 의젓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조바심이 일었다. ‘이런 게 아닌데...’


“우리 물가로 내려갈까?” 

내가 평소 권위적인 말투를 내려놓고 조신하게 말했다.

“어? 어.”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했는데 되레 그 아인 겁먹은 듯했다.


잡초로 뒤엉킨 경사진 언덕을 캄캄한 밤에 무사히 내려갈 수 있었을까? 


두어 발짝 내디디자마자 난 물색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고 미끄러져 내리굴렀다. 허둥지둥 따라 내려온 나의 애인 후보는 더듬더듬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난 정신없이 말려 올라간 교복 치마를 쓸어내리기 바빴고, 그나마 캄캄한 밤에 만난 것을 감사해야 했다.


그 담엔 뭐 했냐고? 뭐 하긴! 쪽팔려서 집으로 와 버렸지.

우린 좋은 친구로 남았다. 그 친구는 S 대 조각과를 졸업하고 한동안 고생한단 소문이더니 모 대학 교수로 자릴 잡았다. 결혼도 여학교 교사와 했고 장남의 의무를 착실히 해냈다. 나하고는 가끔 미술 전시회 오픈 파티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충청도 사투리로 존댓말과 반말을 어색하게 섞어가며 반가워했다.


그 친구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우연히 서오릉 근처 식당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다. 가족 모임인 듯 일행이 많았다. 난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부인인 듯해서 인사를 했는데, 왠지 눈길도 안주는 데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때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이젠 알 것 같다.


우리 모두는 풋사과처럼 떫고 신 십 대가 있었고, 그 기억은 때때로 고개 들어 아직도 살아있음을 일깨워준다. 비록 내세울 만한 연애는 못 돼도 난 내 손녀한테 자랑하고 싶다. 할머닌 열일곱 살에 남자 친구랑 버드나무 밑에서 굴렀다고...


그때 그 시절, 청주 무심천 그리고 벚꽃 

(사진 출처: 충북 in뉴스 - 충청 타임스 - 한국관광공사) 


작가의 이전글 즐거운 나의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