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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Mar 10. 2019

즐거운 나의 집


나처럼 나이 들어 머잖아 세상을 떠날 사람이, 익숙하게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을 지어, 낮선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미친 짓이다. 그러니 웬만해선 피할 일이다. 우리 두 늙은이가 이사 온 새 집은 큰 덩치에 비해 막상 생활하는데 필요한 공간은 그리 넓지 않다. 트윈 침대와 붙박이장이 있는 침실, 소파와 식탁이 함께 들어앉아있는 거실, 거실 동쪽창문 아래는 주방시설이 붙어있고, 북쪽으로 화장실과 수납장 세탁실이 들어와 있다. 최소한의 공간 위에 절제된 설계로 지어진 집이다. 그러나 빤한 구조의 집임에도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학습에 문제라기보다는 정서가 자릴 못 잡고 여전히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희동 집은 온전히 건축가의 독특한 취향에 따라 설계 되었다. 새집을 설계한 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명건축가다. 안국동 한국일보 자리에 들어선, 쩍 갈라진 고목나무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건물이 그 분의 작품이다. 그런 분한테 개인 주택을 부탁한 것은 어찌 보면 무례하고 무모한 결정이기도 했다. 작품을 통해 개인적으로 서로 좋아한다 해도 무리하게 부탁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사를 해볼까 생각한 것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는 며늘애가 아파트건 주택이건 한 공간에서 살면 걱정을 덜겠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를 보러 다니다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하자 낡은 주택으로까지 불이 번지면서 우린 점점 초심을 잃게 되었다. 맘에 드는 집이 있어도 흥정은커녕 번번이 집 주인 얼굴도 못보고 돌아서야 했다. 땅값이 반짝 올라가는 타이밍에 잘못 올라탄 것이다. 성미 급한 며늘애와 뚝심 있는 시어미는 위험천만한 오기가 생겨났다. 연세대 캠퍼스가 있는 안산 서쪽 경사진 땅에 50년 된 낡은 집을 보자마자 며늘애와 나는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바로 이거지? 하고 대뜸 의사소통이 되었다. 한 곳에서 40년이나 살았다면서도 팔 의사가 없다던 집주인이,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보채는 부인 손에 이끌려 겨우 부동산 사무실까지 나온 것을, 우리 두 고부가 부추기고 설득해 계약을 성사 시켰다. 다행한 것은, 그렇게 두서없이 치른 대사치곤 반듯한 땅도 그렇고, 위치도 좋았고, 제일 잘한 것은 흥정도 안 했는데 주위 땅보다 싸게 샀다는 거다. 첫 단추를 잘 끼운 것이다.

<1978년 작 나의 유화>

남편의 아틀리에는 성산동 성미산을 마주보는 곳에 있고, 20년 넘게 그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처음 집을 지었을 때엔 제법 넓다고 생각했었는데 날이 갈수록 그림이 쌓이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창고 수준에 이르렀다. 남편은 평소에 화랑 손님들을 대할 때 마다 옹색한 공간에서 그림을 이리저리 옮기며 보여주는 일을 번거로워 했는데, 특히 요즘 들어 외국 컬렉터들의 작업실 방문이 잦아지는 터라 어수선한 작업 현장까지 노출되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다 240평이나 되는 땅을 보니 욕심이 무럭무럭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작업실까지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왕이면 빈번한 손님들을 맞이할 접객용 홀을 따로 두고 벽에는 작품 여러 점을 걸어놓고 볼 수 있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전시실 정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게 우리 쪽의 소심한 주문이었다. 자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땅과 타협하면서 우리 내외가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집. 그런 집으로 설계가 진행되고 있다 생각 했는데, 그러나 건축가의 욕심은 우리와 달랐던 모양이다.


2년 가까이 기다린 후, 나무랄 데 없이 번듯하게 지어진 집으로 들어와 잘 살고 있지만 어쩐지 편하지는 않다. 만만치가 않아서다. 건물이 너무 당당해서 내가 주눅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집을 찾는 손님은 건물 주위를 기웃거리며 다니다가 출입문이 어디냐고 전화를 한다. 사람의 첫인상은 처음 얼굴을 대할 때의 느낌이 중요하다. 호불호가 평생을 가기도 한다. 집도 빌딩이건 주택이건 출입문을 통과할 때 대충 집 됨됨이를 짐작한다. 특히 체면을 중히 여기는 한국 사람들은 집 대문을 집의 체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80년대에 동교동에 헌집을 사 수리하면서 대문에 지나친 치장을 했던 게 생각난다. 최근에 이사하면서 팔고나온 아파트도 예외는 아니어서 멀쩡한 출입문 놔두고 지척에 회전문을 달더니 로비도 더 확장해야 한다고 입주민 회의 때 마다 그 문제로 싸웠다.


그런데 우리의 새집 출입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아예 기존의 문이란 개념을 없앴다. 그러고 보면 이 집은 오만하기 이를 데 없다. 낯을 가리고 있으니까.


주차장은 한 눈에 봐도 넓고 쾌적하다. 셔터문은 오전 7시면 내가 눈을 비비고 내려가 열어놓고 신문을 주워 들고 3층 주택으로 올라온다. 이때 승강기가 있는 로비에 전등을 켜야만 밖에서 볼 때 출입문 비슷한 곳을 찾아낼 수 있다. 불을 밝히지 않으면 주차장 벽으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미니멀한 디자인이 우리 주차장의 품격을 높이고 있으니 손님이 ‘출입문 찾아 삼만 리’를 하는 상황을 막을 수가 없다.


방문객이 줄어드는 이유가 반듯이 출입문의 낯가림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느 한날 새벽에 주차장으로 내려가 신문 줍고 셔터 문 여는데 이놈의 문이 꼼짝달싹 올라가지 않아 혼쭐이 난적이 있다.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통로가 제 놈 밖에 없다고 유세를 부렸던가 보다. 이래저래 이 집이 여 주인과 친해지려면 시간이 꽤나 필요할 것 같다.


나의 주 공간인 주방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네다섯 발짝 거리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소나무 사이로 작은 아들네가 사는 집이 보인다. 가끔 그 집 거실 창문으로 애들이 키우는 고양이란 놈이 내가 서있는 주방 쪽을 꼼짝 않고 넘겨다 볼 때가있다. 그럴 땐 나도 지긋이 그놈을 마주 바라다본다. 그 놈이 슬그머니 사라지면 그 자리엔 소나무와 창문만이 내 시야에 고즈넉이 남는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먼저 자리를 뜨면, 저 고양이도 소나무 사이로 빈 창문을 나처럼 바라다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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