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활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말고는, 나무랄 게 없다. 시간 내서 운동도 하고, 틈틈이 글도 쓴다. 하지만 내 집은 글쓰기에 마땅한 집은 아니다. 팬티 바람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반쯤 졸고 있는 남편, 보는 이도 없는데 혼자 왕왕대는 티비, 싱크대 위에서 뚜껑 열린 채 껌벅대며 조바심내는 노트북.
빨랫거리를 걷어 세탁기에 던져 넣고 서성대던 걸음을 돌려 노트북을 챙겨 집 앞 커피숍으로 간다. 창문 쪽 의자가 글쓰기에 좋다. 그런데 이미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붙박여 앉아 컴퓨터와 씨름하는 젊은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는 수 없이 글쓰기를 잠시 잊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기로 한다. 나이 들면서 커피 향을 못 맡은 지 한참 됐지만, 잔 가까이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문득 보니, 창을 향해 돌아앉은 젊은이의 널찍한 등이 까닭 없이 외로워 보인다.
열어보지도 못한 노트북을 다시 끼고 터덜터덜 집으로 올라온다. 날씨가 하도 청명해서 그냥 들어가기 아쉽다. 손바닥만 한 마당으로 나가 뒷짐을 쥐고 빙글빙글 돌다, 무심히 고개를 뒤로 꺾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파란 하늘엔 흰 머리카락 같은 구름이 살짝 내려앉아 있다.
그 많은 날 중 어느 하루,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교문을 나선 그날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누가 나를 따라온다고 알아챈 것은 친구들과 뿔뿔이 헤어져 혼자 걷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잔뜩 조심스러웠다. 내가 걸음을 늦추거나 서두르면 그에 맞춰 일정한 거리로 따라왔다. 이윽고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만나주실래요?”
멈칫한 나는 모른 척 하고 다시 걸었다.
“잠깐만 만나주세요.”
애원조의 목소리가 짜증나게 했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보는 것 같자 내 걸음은 더 빨라졌다.
“저기요! 저기요!”
목소리가 집요하게 따라 붙었지만, 혼자서 떠드는 소리라 들리지는 않았다. 그 때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거 봐, 학생!”
돌아다보니 왠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내 뒤를 따라오던 남학생과 나를 불문곡직 지척의 파출소로 끌고 갔다. 어이없게도 죄목은 풍기문란이었다.
1950년대는 학생들 머리 길이나 교복치마 길이까지 줄자로 재고, 규율과 질서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파출소로 사람들을 연행하는 것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 내 경우는 길 가다 물벼락 맞은 꼴이었다.
세 사람의 말은 조금씩 달랐다. 남학생의 말인즉슨, 평소 친해지고 싶었던 여학생이 지나가기에 잠깐 얘기를 하자고 말을 붙였다고 했다. 나는 코빼기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치근대며 따라왔다고 주장했고, 사복경찰은 대로에서 남녀가 수작 부리는 현장을 덮쳤을 뿐이라고 했다. 정복 경찰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붙잡혀온 남학생이 어설프게 항의하다가 사복경찰에게 따귀를 얻어맞는 동안, 난 정복 입은 형사 앞에 버티고 앉아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그 경황없는 중에도 따귀를 맞고 있는 학생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하는 짓에 비해 생김새는 허여멀쑥했다. 결국 사복경찰의 사과를 받아내고 우리는 파출소를 나왔다. 나는 울며불며 집으로 들어섰다. 집에는 고집불통 아버지가 계셨고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파출소로 쫓아갔다.
“죄 없는 여학생을 함부로 붙잡아 들이다니, 이게 민주 경찰이냐?”
아버지는 파출소가 떠나가라! 소리소리 지르고도 분이 풀리지 못한 채 돌아오셨다.
그쯤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으면 여름방학에 벌어진 해프닝쯤으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 날 저녁에 물어물어 그 친구 집을 찾아냈고, 대담하게 그 집 문을 두드렸다. 서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게 마음에 걸린 데다 내가 잘난 척 못되게 군 것을 사과하고 싶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그의 누나였다. 내가 전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자, 그의 누나는 내 손을 잡고 놓지를 못했다. 그 아인 황해도에서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왔단다. 부모님은 원주에서 살고 삼대독자라는 이 친군 돌쟁이 아이 딸린 싱글 맘 누나와 제지공장 앞 남의 집 사랑채에서 살고 있었다. 누나는 내 손을 쓰다듬으며 영 놓지를 못했다.
그 당시 나와 그 아이는 고등학교 삼학년이었다.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존댓말이 어색하고 남자친구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어정쩡한 사이였다. 그 해 여름방학 내내 나는 미술실에서 입시 준비하는 친구들과 나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학 등록금은 걱정 말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만큼 철딱서니 없진 않았다. 떼를 써서라도 미술대학에 갈 것인지, 아니면 취업반에 들어가 주판알 튕기며 동생들 뒷바라지나 할 건지... 감당 못할 전후 현실은 내게 무겁고 우울한 시간을 안겼다. 네댓 달을 그렇게 흘려보낸 뒤 우리는 각자 다른 경로로 서울에 올라왔다.
난 서울에 올라와 있던 언니의 도움으로 미술대학에 들어갔고, 그 친군 대학을 포기하고 영화판에서 겉돈다는 풍문이 들렸다. 우린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않았지만, 그의 누나와 내 언니는 환경이 서로 비슷하다는 이유로 단박에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아이 딸린 청상과부 팔자도 같았고, 부적절한 내연관계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도 같았다. 언니의 연줄로 첩살이하던 그의 누나는 청주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가 살던 을지로 좁은 골목의 한 주택가로 이사를 왔다. 그랬음에도 친구와 나 사인 점점 소원해졌다.
어느 날 우연히 골목길에서 마주친 밤 우린 남산으로 산책하러 갔다. 둘 다 말이 없었다. 길을 벗어나 풀숲에 잠시 섰다. 내 눈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넌 왜 부딪혀 보지도 않고 맥없이 무너지는데! 그렇다고 내가 너보다 올바른 선택을 한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우는 나를 그 친구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결국 한 마디도 못 하고 울다 지쳐 나는 그 친구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희미한 옛 그림자 (윤명숙 촬영)
그날 밤 이후로 우리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언니의 삶을 진저리 치면서도 그 곁불을 쬐며 살아야 하는 내 비참함은 비슷하게 누나한테 얹혀사는 그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린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난 주저 없이 부산의 친구 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친구네 집이라야 피난민촌 산꼭대기의 판잣집이었다. 지게를 지고 산 아래 동네에서 우물물을 길어다 빨래를 하며 한 달 동안 버티다가 결국 다시 언니 집으로 기어들어 왔다.
후줄근한 몰골로 목조건물 이층 내 방으로 올라가니, 뜻밖의 사람이 거기 있었다. 그 아인 제집인 양 편히 앉아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남산에서 엉엉 울며 내려온 후 처음 보는 것이건만, 그는 매일 만났던 사람처럼 무심히 돌아보며 물었다.
“왔어?”
그는 앉은뱅이 재봉틀 앞에서 손을 털며 주춤거리더니 도로 앉아 바지 폭 줄이는 일로 돌아갔다. 말 없는 그의 넓은 등이 한없이 가엾고 쓸쓸해 보였다. 그가 주섬주섬 옷가지를 거둬 일어나 방을 나갈 때까지, 난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줄여줄게. 저리 비켜 봐.”
그때 못 해준 말이 이제야 생각난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 해 겨울 난 가난한 화가와 결혼을 했고, 그 친군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친구가 한강에서 훈련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산달이 가까웠던 나는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때는 그리도 인색했던 감정이 60년이 지난 지금 삶의 끝자락에 불쑥 다가와 가슴 한 구석의 애잔한 그림자를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