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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Apr 12. 2019

꽃은 피고지고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본다. 꽃샘추위가 회색 하늘을 단박에 바꿔버렸다. 아침나절 중정에 나가 빨래를 널고 돌아서 돌확에 살어름 덮인 물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돌확이 들어앉은 비좁은 땅 구석진 곳에 꽃 네댓 송이가 비집고 올라와 파르르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작년 늦가을, 겨울채비를 하면서 돌확에서 얼기 직전의 물을 몽땅 퍼내고 축 처진 수련화분을 건져냈다. 주위에 심어놓은 야생초도 바싹 말라 죽은 모양새라 가지는 잘라주고, 뿌리는 혹시라도 살아있을까 싶어 흙으로 잘 덮어주었다. 그랬는데 신통하게도 녀석들이 언 땅을 비집고 올라와 꽃을 피운 것이다. ‘노루귀’가 꽃 이름이다.


우리집 정원의 노루귀


잎은 보이지 않고 가느다란 세 가닥 꽃줄기 끝에 달랑 한 송이씩 꽃을 매달고 있다. 엷은 노란색 꽃술은 8개의 흰색 꽃잎에 둘러싸여 있는데, 크기는 엄지 손톱 만하다. 지난 봄 이사하기 전 정원 공사할 때는 꽃이 진 후라 무슨 색의 꽃을 피우려나 궁금했는데, 막상 흰색의 새침한 모습을 보니 내가 미리 알고 고른 꽃인 듯 전혀 낯설지 않다.


이 꽃의 단아하고 청순한 느낌은 노루 눈에 가깝다. 물론 꽃잎 모양은 귀를 닮았다. 그래도 내 눈에는 화들짝 놀란 노루의 큰 눈망울이 연상된다.


원래 이른 봄에 피는 꽃이 빨리 지는 법이다. 수선화도 그 우아한 모습을 흰 눈 속에 뽐내고는 이내 미련 없이 진다. 겨울추위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려니 기력이 빨리 쇠진하는 모양이다. 뒤따라 잎도 금방 볼품없어지고, 구근만 땅속에 두더지처럼 숨어서 다음 해를 기다린다.


우리가 새로 집을 짓고 작년 7월에 이사를 왔으니 어느새 이 집에 온지도 일 년이 가까워 온다. 남편은 올 5월에 열리는 회고전을 앞두고 곰처럼 이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나이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작업 못하겠다고 손 놓은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상황인데, 본인은 아직 내려놓을 생각이 없나 보다. 골인 지점을 통과한 달리기 선수가 멈추는 걸 까맣게 잊고 계속 달리는 모양새다. 남편은 이번 회고전에 기필코 신작을 발표하리라 작심하고 덤비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의욕이 앞선다고 몸이 따라주겠나?


어느 날 저녁, 밥 때가 되었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살림집과 작업실이 한 건물에 있어도 지척이 천리라서, 만약을 대비해 설치해 놓은 cctv를 핸드폰 앱으로 보고 있었다. 잠시 전만 해도 화면 속에서 왔다갔다 하던 남편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남편이 작업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이를 깜빡 잊고 흰 물감이 하나 가득 담긴 물통을 번쩍 들어 올리다가 뒤로 벌렁 나가떨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난 젊어서도 남편이 작업 중이면 함부로 작업실을 들락거리지 않았다. 방해 안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컸다. 작업에 빠져 있으면 그는 딴 세상 사람이다. 공연히 얼쩡거리다 엉뚱한 일로 불벼락 맞을까 봐 난 아예 몸을 사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옆에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난 모른 척한다. 이 나이에 앙심을 먹고 하는 소행 머리는 아니다. 단지, 늙어서까지 핀잔 들어가며 뒤치다꺼리할 기운이 없어서다.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서로 참견하고 거들고 하지 않으면 하루를 살아내기 힘든 나이에 왔다. 그렇다 해도 그의 작업만은 오직 그 만의 작업으로 지키고 싶은 게 나의 욕심이다. 60년을 함께 한 내가 아무렴 아내의 본분을 잊었겠는가? 새벽에 신문을 주워오면서 작업실에 슬쩍 들려 전날 남편의 행적을 찬찬히 살펴보고 오는 것으로 직무 태만을 대신하고 있다.


겨우내 실내에 있다가 조급하게 밖으로 내몰린 양난이 ‘노루 귀’ 옆에서 찬바람에 떨며 웅크리고 있다. 잎에 윤기가 사라진 것을 보니 머잖아 몸살을 앓을 것 같다. 측은지심이 들지만 봄에 새싹을 틔우려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웬만한 추위는 견뎌내고 바짝 움츠리고 있어야 힘차게 밀어 올릴 힘이 생기는 법이다. 오래 살다 보니 세상 이치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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