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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Apr 14. 2019

수련 죽이기


수련 화분을 물확 가운데 놓고 흙이 넘치지 않게 살살 물을 채운다. 3분의 1쯤만 물갈이를 해주면 된다. 반나절은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게 내가 아는 상식이다. 

우리 부부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제주도 집에 내려가면 일주일 쯤 쉬다 온다. 쉰다니까 바닷가도 어슬렁거리고, 올레 길도 걷고, 드라이브도 하는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 공항에 내리기 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고작이다. 가끔 회 먹으러 바닷가에 가긴 하지만, 곧장 식당으로 직행하니 바다를 본다고 할 수 없다. 


오지로 알려진 제주도 서남단 한경면 저지리에 지역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예술인 마을이 조성 되었다. 그 중심에는 시립현대미술관이 세워졌다. 예술 종사자들 누구에게나 헐값에 땅을 준다고 꾀이는 공무원의 말에 홀딱 넘어간 남편이 제주도에 당장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거저 얻었다는 땅에 원두막을 짓는다고 해서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2007년인가 집을 보러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깜짝 놀랐다. 원두막은 웬걸, 30평은 돼 보이는 흰색건물이 300평도 넘는 마당에 둘러싸여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게 아닌가? 어이없어 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원두막 콘셉으로 지었다고 우겼다.


2m는 됨직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덜렁 집을 지었기에 습기는 걱정 안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첫 일 년은 곰팡이와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때부터 남편이 제주도에 가자고 하면 난 펄쩍 뛰기부터 한다. 싸워야 할 적은 곰팡이 만이 아니다. 풀과 모기는 가히 살인적이다. 첫해 여름, 마당에서 풀 뽑고 온통 땀에 젖어 샤워하러 들어갔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그만 기절하는 줄 알았다. 원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퉁퉁 부어 일그러진 놀란 괴물의 모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모기는 크기도 하지만 색도 시커멓다. 이름도 깔때기라고 하든가? 아무튼 독종이라 한번 물리면 미칠 듯이 가려울 뿐 아니라 일주일이 가도 가라앉을 줄을 모른다.


제주도 험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그럼에도 제주도에 기를 쓰고 가는 데는 그 만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아마 달콤한 공기와 금방 쏟아질 듯 밤하늘을 뒤덮는 별들이 한 몫 하지 않나 싶다. 날씨 좋은 날은 새벽하늘까지도 파랗다. 태양이 구름 위로 떠오르면 보라색과 붉은색을 비롯해 갖가지 형태의 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바람 탓이겠지만 하늘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날씨 또한 수시로 변한다. 제주도는 밤이 일찍 온다. 


낮에 부지런히 들락거리던 온갖 새들도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남편은 집 지으면서 육지에서 공수한 돌로 물확을 제작해 마당 한 귀퉁이에 들여 놓았다. 세로 2m, 가로 4m이니 상당히 크다. 깊이도 1m는 족히 된다. 첫 해엔 수련 화분을 서너 개 사다 넣고 물을 가득 채웠는데, 겨울에 잘 견디더니 다음 해에 꽃을 피웠다. 마당을 찾아오는 온갖 새들도 잠시 물확에 앉아 목을 축이고 쉬어간다. 다음 해에 모슬포 오일장에 갔다가 금붕어 여러 마리를 사왔다. 당장 수련 사이에 풀어 놓았는데, 며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다니더니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밖으로 튀어 나갔나? 아니면 들 고양이에게 잡혀 먹혔나? 아쉬웠지만 미스터리로 남겨 놓고 서울로 왔다.


올해가 2015년이니까 제주도를 들락거린지 어느새 9년이 되어온다. 올 가을도 가기 싫다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따라 내려갔다. 혼자 아무 때나 훌쩍 다녀오면 될 일을 왜 싫다는 사람 끌고 가냐고? 거기엔 다 그만의 속셈이 있다.


우선 식사가 큰 문제로 떠오른다. 삼시 세끼 다 외식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식당을 가자면 일일이 택시를 부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20km는 가야 한다. 폐차 위기에 놓인 사위의 애마 인피니티를 거금 들여 제주도에 가져다 놓았지만, 낯선 거리를 달릴 배짱이 남편한테는 없는 게 문제다. 내비게이션을 장착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사용 능력이 없다. 나를 죽어라 끌고 내려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57년 경력의 주방장 자격과 34년 무사고 운전 경력의 소유자, 게다가 월급 안줘도 돼, 계단 오르내릴 때 부축도 해줘, 이런 복덩어리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제주도는 가을을 제일 좋은 계절로 꼽는다. 봄은 뼛속을 파고드는 바람 때문에 정이 안 가고, 여름은 태풍이 무섭다. 그러다 11월에 들어서 극성맞은 모기는 사라지고, 바람은 잦아들며, 날씨는 쾌청해진다.


우린 제주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마당으로 나왔다. 금붕어 도둑을 막으려고 물확에 철망을 씌워 놓고 키웠는데, 여름에 다녀가면서 깜박 잊고 철망을 거둬낸 채 서울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수련 뿌리 사이에 숨을 곳이 많으니 괜찮을 거라며 전전긍긍하는 남편을 보고 왠지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은 색이 죽는가 보다. 누렇게 바랜 수련 잎 사이로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쑥을 갈아놓은 것처럼 걸쭉하고 푸르죽죽한 침전물 위로 악취가 진동한다. 물이 썩어 산소 부족으로 금붕어가 죽었는지, 아니면 금붕어가 새에게 다 잡아먹히고 난 후에 급격히 물이 썩었는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음 날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고 작업복을 잔뜩 껴입고 썩은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장장 세 시간이 걸렸다. 잡풀을 뽑으면서 늘 하는 생각인데, 인간이 자연을 이기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풀은 뽑고 돌아서면 금방 다시 자라난다. 그렇게 자연은 생명력이 강하다. 갖가지 풀은 서로 군락을 이루며 공생한다. 쑥은 뿌리가 깊어 뽑기가 굉장히 힘들다. 작은 뿌리라도 남겨 놓으면 틀림없이 다음 해에 쑥쑥 자란다. 쑥이 내가 왜 풀이냐고 불평해도 할 수 없다. 예쁜 민들레꽃도, 톱니 칼 같은 쐐기나 찍찍이처럼 붙으면 안 떨어지는 도깨비풀을 동원해 위협한다 해도, 사생결단하고 몽땅 뽑아야 한다. 안 그러면 잔디가 살아남지 못하니까.


물확에 잔뜩 낀 이끼를 솔로 박박 문질러 깨끗이 씻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남편은 뭐가 못마땅한지 조각조각 뜯어 건져올린 수련 뿌리 무더기를 뒤적이며 뿌리는 살아 있다고 우겼다. 모슬포 오일장에 가서 금붕어도 사고 건강한 수련도 사다가 다시 심자고 달래도 심사가 틀어졌는지 멀쩡한 것을 마구 버린다고 툴툴 댔다. 이사하면서 남편 버리고 가는 여편네도 있다던데, 그까짓 다 썩어 문드러진 수련 뿌리 버렸다고 그렇게까지 할 게 뭔가? 물 푸던 대야며 호미, 곡괭이, 톱을 모두 쓸어 담아 일부러 덜그럭대며 집으로 들어왔다.


시원하게 샤워하고 얼굴에 로션을 듬뿍 바르며 창문 밖을 보니, 그때까지도 남편은 물확을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 버리려고 했던 이끼 낀 화분 세 개가 안 보이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다시 주워다 물확 속에 넣은 게 분명하다.


에잇! 오랜만에 얼큰한 라면이나 끓여볼까 하고 냄비에 물을 끓인다. 내년 봄에 오면 아마도 수련이 새싹을 밀어 올린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죽은 줄 알았던 수련이 살아나면 그 아니 좋은가? 아니면 이끼 뒤집어쓴 빈 물확 속을 들여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흘리고 있는 내가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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