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으로 이사 온 지 한참 되었어도 동네 길을 구글 맵으로 확인했을 뿐 직접 돌아다니며 살펴보지를 못했다. 새집이라 그런지 한동안 낯섦이 가시지 않았고, 특히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남의 집 방문하듯 서먹했다.
그래서 동네 탐방은 뒷전으로 밀어 뒀었는데 오늘은 날씨도 좋고 먼지도 덜해 자연스럽게 발길이 무심한 나를 집 밖으로 데려나간다. 남쪽엔 연세대, 서쪽으로는 우리 동네를 에워싸고 있는 안산을 향해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을 나선다. 초입에서부터 오름세가 가팔라 숨이 턱에 찬다. 다행히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우선 숨이 안 차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나는 일부러 잘 닦인 길을 놔두고 험한 샛길로 들어선다. 올라갈 때는 안 보였던 진달래며 개나리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보니 산 중턱에 빽빽이 밀집해 있는 소나무 숲이 보인다. 바람에 서걱대는 나뭇잎 소리, 풀쩍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 소리, 발밑에서 구르는 자갈 소리...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소리가 까무룩 멀어지며 이상한 정적에 휩싸인다. 혼자 산속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이 느낌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다. 기시감 하고는 거리가 있다. 이 불편한 느낌이 오래 지속되면 당연히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젠데, 찰나에 스치며 사라지기 때문에 굳이 캐보려고 시도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 산속을 혼자서 헤맨 기억이 있다. 정확히는 6·25전쟁이 난 다음 해 겨울, 어느 날이었다.
1951년 우리 가족은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쪽을 향해 피난길로 들어섰다. 청량리역에서 요행이 기차지붕에 올라타 양평까진 실려 왔는데, 거기서부터는 기차가 꿈쩍도 안했다. 별 수 없이 우린 짐 보따리를 챙겨들고 기차 지붕에서 내려와 피난민 대열에 끼었다. 열흘 만에 청주시에서 십리쯤 더 들어간 농촌마을, 아버지의 6촌 형님네 사랑채에 짐을 풀었다.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두꺼운 진흙 벽과 두툼한 초가지붕도 그 끔찍한 추위는 막아내지 못했다. 전쟁이 나기 전 내가 10살 때, 정확히 말하면 1948년 2월 13일, 남동생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용쓸 때 나는 미역국 대신 먹은 버섯전골에 채해 방구석을 헤매고 있었다. 식구들은 몽땅 엄마한테만 정신이 팔렸고 언제나 내 편이던 할머니까지 내 옆에 없었다. 나보다 다섯 살 위 언니는 나를 내팽개친 채 산파 곁에 붙어 시중을 드는 척했다. 혼자 토하고 또 토했다. 깜박 잠이 들면 가위에 눌려 몸부림을 치다 깨어나길 반복했다. 밤새도록 내 지르는 엄마의 괴성은 꿈속인 양 가뭇하게 스러지다 이어졌다 했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남동생이 태어난 것을 알았다. 나는 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응석받이 막내라는 아까운 자리를 조막 만한 울보에게 넘겨주고 한동안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그때 먹고 체했던 송이버섯을 지금도 역겨워할까.
그 울보 남동생이 3살 되던 해 전쟁이 났다. 피난지 산골 벽촌에서 동생은 홍역을 앓고 난 끝에 폐렴에 걸렸다. 아버지는 돈이 될 만한 옷가지를 싸 들고 밤낮으로 대전까지 걸어가 간신히 페니실린을 구해 와서 동생을 살려냈다. 염치와 경우를 목숨처럼 지키는 서울 토박이 부모님이 그 가난한 산골에서 어떻게 부대끼며 살아남으셨는지, 지금은 두 분 다 안 계시니 그 비결을 알 길 없다. 논과 밭 사이에 집도 몇 채 없고, 내 또래 아이는 아예 구경도 할 수 없는 곳. 그나마 골골하는 동생도 두 분이 끌어안고 있으니,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아침이라고 한술 먹고 나면 난 지게를 걸머지고 산으로 삭정이를 주우러 갔다. 낫이랑 갈퀴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동네 야산도 나무가 울창하지만, 그때는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온돌도 데우고 밥도 끓이던 때라, 인가 가까이 있는 산은 모두 민둥산이고 나무를 보려면 산속 깊이 들어가야 했다. 내가 기껏 끌어모을 수 있는 땔감이라야 가랑잎과 삭정이였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날, 그러니까 산속에서 홀로, 마치 딴 세상에 던져진 듯 막막하고 두려운 느낌과 마주친 그 첫날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바닥만 살피며 주춤주춤 올라가다 보니 꽤 깊은 산속이었다. 그 난리 통 속에서도 어린 소나무는 구석구석 자라고 있었다. 난 낫을 휘둘러 생솔가지를 쳐냈다. 아무도 없건만 누가 볼세라 마른 칡넝쿨로 단단히 묶어 지게에 올리고는 삭정이와 가랑잎으로 슬쩍 덮어 위장까지 했다. 나는 잠시 허리를 펴고 느긋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나의 드로잉, 2019년 4월 19일
설핏 기운 해가 나무 그림자를 으스스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새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눈덩이가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만 괴괴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지게를 둘러메고 뒤뚱뒤뚱 산 아래를 향해서 내려오는데 어쩐지 점점 깊은 산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둥지둥 헤매다 간신히 인가를 찾아 달려가 보니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굴뚝에서 연기만 피어오르는 낯선 동네였다.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고 엉뚱한 길로 나온 것이다.
드디어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꺼이꺼이 울고 나니 무서움도 사라지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기어코 혼자 집을 찾아왔고, 부모님에게 후줄근한 꼬락서니를 들키기 싫어 몰래 기어들어 갔다. 아침에 나갈 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집이 나를 안심시켰다. 부엌 구석에 나뭇짐을 부려놓고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은 나는 시름시름 사위어가는 불꽃 위에 솔가지를 힘차게 던져 넣었다.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파란 불꽃과 함께 솔 냄새가 진동했다.
솔 내음이 코끝에 스치는가 싶더니, 정적이 깨진다. 바람이 다시 불고, 나뭇잎은 서걱서걱 몸을 뒤챈다. 푸드덕 날아올랐던 새는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다. 나의 눈을 통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12살 아이가 하늘을 본다. 짙은 솔 내음이 가득 퍼진다.
산자락 길로 내려오는데 연신 승용차가 길가에 주차할 곳을 찾아 멈춘다. 등산객들이 타고 온 차들인 모양이다. 비교적 잘 정리된 인도에는 친절하게도 띄엄띄엄 목수의 손길이 느껴지는 통나무 의자가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몇 십억 들여 조성됐다는 안산 산자락 길은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편리하고 안전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자세히 그려진 산 지형과 안내문을 들여다보며, 오늘 내가 걸은 거리가 몇 Km나 될까 계산해 본다. 이 산을 한 바퀴 돌아보려면 대충 계산해도 한 달 이상은 투자해야 할 것 같다. 떠들썩한 등산객 틈에서 좀 전에 마주한 정체불명의 느낌은 까맣게 잊은 채, 난 콧노래를 흥얼대며 반쯤 핀 벚꽃 나무를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