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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Apr 29. 2019

우물쭈물하다가

전에 살던 아파트 바로 코앞 상가에 김 아무개라고 이름을 내건 미용실이 하나 있다. 스스럼없이 슬리퍼 끌고 가도 나무랄 사람 없고, 가격도 비싼 편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사 간 후로 5년 가까이 그 미용실에서 파마했다. 이층이라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들지만 (요즘 부쩍 숨이 차다) 일단 올라가면 내 세상이다. 머리하러 오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지만, 대게는 나 혼자 할 때가 많다. 그러니 자세를 바르게 할 필요도 없고, 들어가면서 ‘아구구구’ 엄살 부리며 의자 두 개 중 하나에 털썩 앉아도 눈살 찌푸릴 사람이 없어 만판 편하다.


50 중반의 미용사는 머리 가꾸는 솜씨는 괜찮은 것 같은데 방 꾸미는 덴 젬병인 듯, 가게 안은 늘 허접쓰레기로 어수선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목에 둘러주는 수건도 퀴퀴한 냄새 나기 일쑤다. 오후에 가면 음식 냄새까지 진동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노릇이니 눈살 찌푸리기보단 먹다 남긴 귤이나 떡 쪼가리를 얻어먹고 만다. 그것까진 백번 양보한다 해도 도저히 버티기 힘든 게 있는데, 머리하는 동안 집요하게 별별 것을 다 사달라고 졸라대는 것이다. 화장품, 머리 세제, 하다못해 건강식품까지... 거절해야 할 품목이 날로 늘어난다.


막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돈이 좀 모이자 나는  퇴근한 남편을 대동하고 어둑한 저녁에 집을 보러 갔다. 집 장사가 갓 지은 산뜻한 이층집이었다. 복덕방 아저씨의 입담도 좋았지만 우린 거실 한가운데 현란하게 번쩍이는 샹들리에 (낮에 보면 조잡한 것에) 홀랑 빠져 덥석 계약했다. 그 집은 절두산 성당으로 가는 대로에 있었다. 좁은 골목이나 언덕배기, 아니면 연탄가루 날리는 철길, 여름이면 시궁창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개천 옆집을 전전하던 내게 그 집은 가히 대궐이라 칭할 만 했다.

[사진] 2층짜리 작은 단독주택이 40년이 흐른 지금은 5층 빌딩으로 바뀌고, 주변엔 젊음의 핫플레이스들이 들어섰다. 네이버 스트리트뷰 


아래층 주차공간은 작업실로 쓰고, 그 옆에 붙어 있는 방은 창고로 쓰기 딱 좋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대궐이 기름보일러 난방인데, 우리 속사정은 비싼 기름을 살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과감히 연탄보일러를 위해 마당 한 구석에 창고를 지었고, 겨울이 되면 아침저녁으로 연탄을 12장씩 갈았다. 미장원 얘기하다 왜 딴소릴 하나 하겠지만 이 연탄보일러 창고가 나중에 미장원으로 둔갑 했고, 따라서 내가 미용학원을 두 달 만에 속성으로 다녀 미용사 자격증을 따낸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별안간 미용실 차릴 맘이 왜 생겼냐 하면, 또 얘기가 상당히 길어지는데, 작업실로 쓰는 차고가 점점 비좁아져서 경기도 안성에 집을 짓고 작업실을 그리 옮기는 바람에 당연히 아래층이 비워지지 않았겠나! 내 친정 얘기를 하자면 또 한없이 얘기가 길어지니 각설하고, 연로하신 친정아버지 어머니를 그곳으로 끌어들일 명분이 생겼고 대학 다니는 막냇동생은 덤으로 따라와 주었다. 자식을 늦게까지 낳은 죄로 부모님은 그때까지도 막내 뒷바라지며 시집간 딸년 외 손주 녀석까지 떠맡고 있었다. 이쯤에서 다시 미장원 얘기로 돌아가 보자.


연탄 광 한쪽을 확장하고 인테리어에 돈을 들였더니 아담하고 조촐한 미용실이 탄생했다. 미용사도 모셔오고 큼지막하게 간판도 달았다. ‘풀잎 미용실’.


자리가 잡히고 수입도 친정 식구 기초 생활비 정도 나올 때쯤, 하루는 아침 일찍 미용사가 출근도 하기 전, 낯선 젊은 손님이 급하게 들이닥쳤다. 그 손님은 당연히 나를 미용사로 알았다. 분명히 말하는데, 손님을 붙잡을 욕심으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그 정도로 쫀쫀한 인간은 아니다) 벽에 걸린 미용사 자격증에 환한 내 얼굴 사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바람에 그만 내 손이 어쩌려고 수건을 손님의 목에 두르고 드라이기를 쥐고 만 것이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이제나저제나 미용사가 뛰어 들어와 주길 기다렸으나, 손님의 머리가 다 마르고 뒤엉킬 때까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간신히 짜증을 참고 있던  손님이 발딱 일어나더니 머리에 물을 찍찍 뿌리고 열 손가락으로 머리를 벅벅 내리 쓸며 나를 노려보더니 "에이! 씨!" 하며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잘 쓰는 ‘참담함’이란 낱말은, 내가 그날 온몸으로 뒤집어쓴 참담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다. 난 그날부로 다신 미용실에 얼씬도 안 했다. 본 사람은 없지만, 내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서였다. 손님이 들어왔을 때 "미용사가 아직 출근 안했습니다" 라고 딱 부러지게 말 했어야 했다. 화를 불러들인 건 자존심도 쥐뿔도 아니었다. 그건 한마디로, 어리석음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동네 미용실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것은 다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인데, 그래도 그렇지, 바로 코앞에 김 아무개 미용실은 내 인내심을 언제까지 시험하려 들 건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나로 말하자면 소싯적에 풀잎미용실 벽에 미용사 자격증을 걸어놨던 사람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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