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립거나 보고 싶기보다 미안한 맘이 먼저 앞선다. 나이 팔십에 감성이 메말라진 탓도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늙은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엄마는 몸집이 자그마하고 얼굴선이 가냘팠다. 예쁜 얼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밉지도 않았다. 성품은 사근사근했지만, 줏대가 없고 의존적이었다.
1933년 19살의 내 엄마
1950년 내가 12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겨울 우리 가족 5명은 해군 복무 중인 약혼자를 따라 먼저 내려가 있던 언니의 도움으로 진해 중심가에 방 하나 붙어 있는 상점을 빌려 피난 보따리를 풀었다. 온종일 같은 노래를 틀어대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낡은 극장이 바로 코앞에 있어 조용할 날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 용케 중심가에 터를 잡았으니 뭐라도 팔아볼 요량을 할 만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평생 장사라곤, 전쟁이 한창이던 여름 동대문 시장 바닥에서 돼지 삼겹살 고추장 발라 구워 판 경력밖에 없는 지라, 천 리 타향에서 아무리 빈 가게를 확보했다손 쳐도 막상 장사는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어머닌 뜨개질 솜씨가 일류였고, 할머닌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차츰 인근에 소문이 나면서 일거리가 들어왔다.
두 분 활약에 비해 아버지 하는 일은 빛을 못 봤다. 전쟁 전에 하던 일이 광업 계통이려니 알고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아버지가 선택한 일거리는 손재주 없는 남자들을 돕는 일이었다. 라이터돌을 갈아주거나, 고장난 라디오, 축음기, 뭐든 망가진 것을 멀쩡하게 고치는 재주는 타고나셨다. 허나 별로 돈이 안 되는 일이라서 어머니의 빈축을 샀다. 어머닌 원래 잔소리꾼으로 유명했는데 살림이 궁핍해지자 그 놈의 잔소리가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락에 맞추어 하루 온종일 돌아갔다. 물론 손 또한 쉬지 않고 날렵하게 뜨개질을 떴다. 할머니도 묵묵히 아들 흉을 들으며 바느질손을 놓지 않았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 망가진 물건들과 씨름하다가 집에 들어오는 길에 남편이 가끔 마시는 술을 어머닌 절대 용납을 못 했다.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다고 시작한 잔소리는 옛날 옛적 술 마시고 실수한 얘기로 이어지고, 아버지가 자리를 뜰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남자가 술 마시고 실수했다 하면 자칫 바람피웠나 오해할 소지가 있는데, 내 아버진 평생 한눈을 판 적이 없다. 엄마 입장에서 보면 당신의 매력이 출중해서 그렇다고 믿고 싶겠지만, 내 보는 바에 의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내 아버지는 프랑스 배우 샤르르 보와이에를 닮았다. 특히 눈꼬리가 약간 처지고 네모진 턱이 골진 것도 모자라 푸르스름하게 구레나룻까지 덮였고 머리 또한 곱실거렸다.
1934년 25살의 내 아빠
운수 사나운 어느 한날, 아버지가 얼큰하게 한잔하고 어스름 녘에 비틀거리며 돌아오다 길가 개천으로 곤두박여 동네 사람들이 끌어내 주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값비싼 라이터며, 고쳐달라고 맡긴 남의 물건들까지 시궁창에 처박혔다. 밤새 마음 졸이던 나는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한달음에 쫓아가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먼저 와 흩어진 물건들을 줍고 있었다. 아버지 옆에서 흙 범벅이 된 깨알 같은 라이터돌을 주우며 내가 간절히 말했다.
“그냥 다 버리면 안 돼?”
아버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예상 한 데로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했다. 난 아버지가 또 내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소리쳤다.
“그만 좀 해! 엄마!”
서울에서 청주로 걸어가던 피난길에 우린 아버지를 한번 놓친 적이 있다. 할머니와 어린 동생은 할머니 친인척의 도움으로 군 트럭을 얻어 타고 먼저 떠났고, 우리 세 식구는 보따리를 둘러메고 피난길로 들어섰다. 한겨울에, 춥고 배고프고 무거운 짐까지 졌으니 하루에 30리(지금의 12km) 걷기도 힘들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걷다가 며칠 지나자 아무 생각 없이 팔다리가 자동기계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피난 무리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아버지가 안 보였다. 엄마의 짜증 섞인 넋두리는 아버지가 없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 앞으로 내달렸다. 아버지처럼 위아래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한길을 벗어나 논두렁길로 가는 것을 보고 나는 그 길로 따라가게 되었다. 발길을 늦춰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쌩하니 앞서가는 아버지를 허둥지둥 따라가며 엄마를 향해 투덜댔다. 오죽 잔소리가 듣기 싫으면 저렇게 내빼겠냐고. 마을 어귀에 다다라 가까이 가보니 아버진 줄 알고 따라간 사람은 흰 바지저고리 입은 농부였다. 이미 사방이 어두웠다. 되돌아갈 길은 멀었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난 두 다리 뻗고 앉아 체면불고하고 엉엉 울었다. 아버지와 영영 헤어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다 사위어가는 모닥불 옆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 왔던 길을 되돌아가 피란민 행렬을 정신없이 헤집고 다니는 아버지를 겨우 붙잡았다. 아버지를 보자 여전히 쫑알대는 엄마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가끔 생각해보지만, 아무리 좋게 평가를 하려 해도 답이 없다. 인정머리 없고 잘난 척하고 곰살맞은 데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다. 학부모 참관일엔 아버지만 오라고 못을 박았는데, 그 이유는 단지 엄마의 키가 작다는 거였다. 딸의 신뢰를 받지는 못했어도 성품이 고운 엄마는 평생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시어머니가 당신 돌아가시는 날까지 며느리 살림을 도맡아 해줬고 아버지도 폭풍 잔소리 들어가며 오직 엄마만 사랑했다.
글을 쓰는 중에 딸이 왔기에 넌 외할머니를 어떻게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외할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은 많은데 할머닌 그냥 할아버지의 그림자 이미지로 남아 있다고 했다. 청상과부 시어머니와 40여년을 함께 살았고, 이상과 꿈만 높았던 남자와 6남매를 키웠는데 당신의 삶이 안 보인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남편의 그늘에서, 자식들 틈바구니에서 희미한 존재로 남아있는 어머니를 지금이라도 손을 뻗어 잡아당기고 싶다. 그리고 많이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다. 잔소리가 많고 키 작았던 엄마를 실은 무척 사랑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