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저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특히 고전이란, (중략)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읽지 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 오만은 오이디푸스의 자신감을 닮았습니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읽다 - 김영하 산문, 김영하, 문학동네)
2.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스무 살의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것이 점점 쉬워지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먹고살기 바빠질수록, 사회적 지위가 한 단계 올라갈수록 혹은 경제적으로 조금씩 더 안정돼 갈수록, 뭐든 쉬워진다. 합리화도, 지금 내가 가진 것에 안주하는 것도, 크고 작은 불의를 모른 척하는 것도,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쉽게 대하는 것도 점점 쉬워져서, 조금만 경계를 게을리하면 금방 그렇게 되고 만다. 나는 절대 저런 어른은 되지 않을 거야, 했던 어른의 모습으로. (나를, 의심한다, 강세형, 김영사)
3. 왜 서사(이야기)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 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판단 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마음산책)
4. 우리는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에겐 직관, 의혹, 육감, 모호한 공상, 이상하게 뒤섞인 감정이 있으며, 이 모두는 단순 명료한 판단을 방해한다. 여러 기분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예전에 느꼈지만 명확히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정확히 파악한 듯 보이는 예술작품들과 우연히 마주친다. 알렉산더 포프는 시의 한 핵심 기능을, 우리가 어설픈 형태로 경험하는 생각들을 붙잡아 거기에 명료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우리가 ‘자주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는’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생각, 나 자신의 경험이면서도 쉽사리 사라지고,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을 붙잡아 예전보다 더 좋게 다듬어 나에게 돌려줄 때,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느낀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 존 암스트롱, 문학동네)
책은 결국 인생을 '좀 더 내 마음에 들게' 살기 위해 읽는 건 아닌가 싶고, 그 핵심인 '내 마음'을 독서를 통해 점차 알게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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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독서의 필요성'은 상대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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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내 마음에 들게' 사시는 분은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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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책 속에 길이 있다'는 클리셰가 아직도 통용된다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보는 것도 리스크가 그리 크지 않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