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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퀘스트 Mar 30. 2019

지금이 좋다 | 봉태규 에세이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


그 녀석이 내뿜는 사람다움이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무턱대고 시비를 거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성격이 너무 고약해 ‘이건 누구라도 손 쓸 수 없겠는걸.’ 하고 혀를 끌끌 찼던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 녀석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한참을 고민해도 딱히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기다려주고 들어주는 수밖에.


말보다는 몸으로 부르짖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마음에 동요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 본래 인간이란 언어와 상관없이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 않았던가. 진화를 거듭해 언어가 생기고 말이 유통되면서 대화를 나누게 된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지만, 태초의 사람은 말과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 모든 의사소통을 했었다.


그 생각을 하면서부터였을까? 녀석의 모습이 보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원초적인 사람다움이 내 눈에 밟혔다. 나는 이제 적당히 나이가 들었기에 녀석처럼 온몸으로 내지르는 보기 좋은 본능을 다시 갖기 어렵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모습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녀석이 가진 순수함이 무척 멋지다고 감탄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소리 지르고 땀 흘리고 웃고 울고 자신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지금의 나에겐 도무지 어려운 일이다. 이미 나는 사회화가 몸에 배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주변을 더 신경 쓰도록 진화된 생물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내 감정에 솔직했던게 언제인지 기억이 아득하다. 보이는 걸 그대로 바라본 게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똑바로 쳐다본 적은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드러내지 않는 것, 감추는 것이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자세라고 크게 착각하며 살게 됐다. 본디 사람이란 당연히 실수투성이 아닌가? 조금 모자란 부분에서 멋이 나오는건데……. 어릴 적 읽었던 <바보 온달>이 큰 교훈을 가르쳐줬는데 잊고 있었다. 모자라도 괜찮다. 누군가 빈 곳을 채워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려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라는 사람은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맘껏 부딪치며 울부짖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녀석이 더 부럽다. 아니 솔직해지자. 어금니를 꼭 깨물 정도로 질투가 난다.


영화 <록키>가 생각난다. 록키가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시합을 끝낸 뒤 사방을 둘러보며 첫 번째로 한 행동. 온몸의 힘을 쥐어짜며 했던 그의 몸부림은 바로 연인이자 은신처인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행위였다. 왜 그 장면이 어릴 때부터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나는지 이제야 천천히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는 온전히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록키도 온몸을 깎는 혈투를 치르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내 부족함과 모자람이 챔피언 벨트에는 닿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만 진심을 다한 내 마음만큼은 그녀에게 꼭 전달해야 한다고. 내가 모자라고 부족해서 비록 경기는 졌지만 나의 권투는 진심이었다고.



내가 온몸으로 부르짖고 부딪쳤을 때
그것이 비로소 언어가 되어 상대의 마음에 진심이 전해진다.

긴말은 필요 없다. 숨이 막히도록 “에이드리언!”을 외치고 그녀 품에 안기며 거친 호흡을 내뱉는 것으로 충분하다, 두 사람의 교감은.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농구는 전혀 할 줄도 모르면서 농구부에 가입하기 위해 무턱대고 주장인 채치수와 대결하고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자기 몸이 부서지도록 부상을 입으면서도 “내 영광의 시대는 지금”이라며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본 적 있는지? 강백호도 알았던 것 같다. 천재라 우겨대던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고 부족한지, 말뿐인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크게 부상을 당하고 나서야 무의식 속에서 진심이 튀어나온 것이다. 농구를 시작하고 그제야 겨우 자신의 마음이 새어 나온 것이다. 


28개월 된 녀석은 하루에도 몇 번씩 록키처럼 온몸을 다해 나에게 진심을 전달한다. 언어가 아닌 몸으로 사력을 다해 자기 마음을 나에게 전달한다. 그러다 지치면 에이드리언 품에 안긴 록키처럼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 마음이 어떤지 나도 안다. 이제는 나도 성숙해졌으니 그 마음을 이해한다.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녀석은 부상당한 록키처럼 납작 엎드려 자신의 부족함을 울부짖는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무의식 속의 진심을 얘기한다.


“까까!”

너무나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난 당황하지 않는다.


이 녀석의 마음이 어떤지, 몸으로 울부짖은 그 언어가 무슨 뜻인지 알기에. 이 녀석에게 나는 에이드리언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직은 아빠보다 에이드리언이 되는 게 더 좋다. 



■ 봉태규 에세이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 중에서 읽어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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